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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Dec 10. 2020

내 어머니는 내가 연쇄살인범이 되길 바랐다

내 아이의 뇌에 어떤 스토리를 심을 것인가 라는 제목의 유튜브 강연이 있었다. 장동선 뇌과학박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니 그와 나의 나이대가 비슷한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같은 성취를 한 밑바탕에 있는 것이 뭔지도 보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의 존재가 무척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칭찬을 먹고 자랐다. 그게 과장되었을 지언정, 새싹에게 내리는 단비처럼 장 박사에게 계속 긍정적인 기운을 심어주었고, 부담은 되었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성장을 지독하게 방해하는 쐐기가 되지는 않았겠지.


"내 아이는 천재야. 그림도 잘 그리고 독어로 된 책을 혼자 읽어버리는. 대단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례로 들으면 더 마음에 와닿는 법이다.


나의 부모는.

나에 대해서 자랑하기는 커녕 험담을 했다.

쟤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잘 하는 게 없고.

나 없을 때 어른들끼리 모여서도 내 흉을 봤고, 내 앞에서는 험담이 아니라 '모자라다'는 취지로 욕을 하면서 날 밀쳐서 넘어뜨렸다. 

그러나 사실 나는 잘 돌아보면 그들의 평가와는 다른 특출함을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줄곧 '너를 낙태하러 병원에 갔는데, 더 낙태하면 내 몸에 이상이 온다고 의사가 막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낙태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거지로 낳았지. 그래서 낳았는데 어찌나 못생겼던지.'


너무 못생겼기 때문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몇 번이고 신체적인 위협을 했다. 그런데 내가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그리고 못생겼다는 것은 그녀의 주관적인 평가로, 나는 당연하게도 가족들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어머니는 예전에 미스코리아에 선발된 적이 있다.)


희미한 기억 속에는 이런 게 있다.


"아니, 저 상처는 옆집 애가 와서 저 쪼꼬만 애를 안아보겠다고 하다가 떨어뜨려서 난 상처야."


아마도 내 얼굴 위쪽,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 누군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자 그녀는 존재하지도 않은 옆집 아이 핑계를 댔다. 옆집 애가 나를 들어보려고 하다가 떨어뜨려서 상처가 났다고. 


거짓말쟁이.


뭐, 그건 그렇고.


아마 4~5살 정도였던 것 같은데, 나는 집에 있던 그림책을 보면서 혼자 글자를 깨우쳤다. 나에게 아무런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부모가 학원 같은 데를 보냈을 리가 만무하다. 어쩌다 보니 혼자 배웠다. 배움의 도구는, 나보다 세 살 위의 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준비되어 있던 것으로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혼자 음절이나 글자를 깨우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방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시간에 내 어머니가 무엇을, 하였는고 하니, 그녀는 내 존재를 무시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그리고 보호자와 애정을 쌓을 수 없었던 나는 도구와 애정을 쌓았던 것이다. 애정의 결과가 바로 그를 이해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숨겼다. 


그때도 이미, 그녀가 나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으며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아는 순간 나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란 완벽하진 않은 법. 나에게 적대적인 인간에게 그만 내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만 적이 있었다. 그 때, 웬만한 부모라면 가르치지지도 않은 언어를 아이가 혼자서 깨우쳤다는 점에 놀라워하면서 '얜 대단하다'라고 칭찬을 할 수도 있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녀는 놀랍게도 그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그녀 스스로의 악독한 한계성을 나에게 증명했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너 지금 나에게 사기치는 거지? 나한테 자랑하려고 외워둔 거야?"


눈을 부릅뜨고 내 작은 어깨를 양 손으로 쥔 채 사정없이 흔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악귀와 닮아 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게 내 잘못은 아닌데, 내가 자신의 기대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그녀는 증오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죽었으며 좋았을 아인데, 뛰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내가 폭력을 휘두르면서 마지못해 데리고 있는 아인데.


이 아이는 똑똑해서는 안 돼.


똑똑하다면, 내가 한 짓거리들이 사실은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되며 범죄라는 것을 깨우칠 거 아니야?


뭐 이런 공포가 숨어있는 반응이 아니었나 지금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까지 분석해낼 머리가 네 다섯살이었던 나는 없었다. 


다행히도 이미 거듭된 폭력으로 나와 그녀와의 신뢰 관계는 손상된 상태였기 때문에, '믿었던 엄마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다니' 같은 슬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리 어릴 때부터 나는 냉정하게 그녀와 나 간의 거리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니 너무 웃긴다. 다섯살 짜리 아이한테 너 나한테 사기치는 거지 라니 ㅋㅋㅋㅋㅋㅋ 자신이 다섯 살 짜리 아이의 머리만도 못하다는 공포를 느낀 건가?)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던 나는 현재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정 반대의 일이 있었던 장동선 박사라는 사람은 훌륭하게도 뇌과학 박사고 말이다.

시작부터 지독하게 달랐으니 당연하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장 박사는 세바시 강연에서 '아이는 부모가 만든 자신에 대한 스토리를 계속 기억한다'는 식의 증거들을 나열해서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조금의 희망을 얻기 위해, 그러니까 나와 같은 사람들의 경우도 멀쩡하다는 근거를 얻기 위해 그 영상의 댓글을 확인했는데, '이른 새벽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그 모습이 가끔 영상처럼 펼쳐져 행복할 때가 있다'라는 글만 발견했다.


그런 평범한 행복을 알 수 없다. 내가 공감을 느끼는 것은 연쇄살인범의 어린시절 이야기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살인을 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어린시절에 관한 이야기들 말이다. 단 한명의 기댈 만한 어른도 없고, 부모는 정말 말 그대로 한 줌의 애정도 보이지 않고, 증오와 폭력만으로 일그러졌던 삶의 이야기들.


나는 아직 연쇄살인범이 되지 않았다.  비록 사회생활에 장애물이 많지만, 아직 누군가를 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삶은 성공적이다.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닌가. 아무리 돌아봐도 나의 부모가 아주 여린 애정의 편린이나 공감하는 말들, 심지어 포옹해주거나 얼굴을 쓰다듬어 준 적도 없는데 이렇게 제대로 자랐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신기하다. 


그것은 내가 부모와 링크가 되었던 게 아니라 책과 링크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내 애정의 대상은 인간이 될 수 없었다. 내 근처의 어른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 애정의 대상은 책이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집착적으로 집 안에 있는 책을 읽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나를 살리지 않았나 싶다. 사랑스러운 추억과 기억이 하나도 없는 어린 시절에 나를 버티게 해줬던 힘은 책에 있었다.

다만, 내가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내가 사랑하는 책을 찢기 시작해서 문제가 돼긴 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연쇄살인범이 되길 원했던 사람이다. 내가 인생에서 밝은 기억 한 조각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내가 집착하는 책을 갈기갈기 찢어서 전시하기를 즐거워했다. 심지어는 내가 사랑한 책에 덕지덕지 낙서를 하곤 했다. 거의 성적인 욕이 많았다. 내 얼굴에 그런 욕을 쓰고 싶은데, 아니면 내 육체를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경찰에 불려가니까 그에 못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사랑했던 책이 넝마가 된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를 떠올리면 그저 머릿속이 까맣게 된다. 그 분노를 바깥으로 표출했다면, 분명 나는 그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누른 바람에, 여전히 그 독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 너무 우울하다. 장박사가 하는 말에서 벗어나야겠다. 그가 저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를 긍정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부모가 그에게 '네 미래는 밝을 거야'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을 그리워하고 있나보지. 그래서 수많은 다양한 뇌과학적 연구결과 중에서 하필이면 저런 결과를 들고 와서 아이가 있는 엄마들에게는 은근한 협박을 '그러니 애들에게 잘해'하고, 예전에 좋은 얘기를 해주셨던 부모의 은혜가 그립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 반대한다.

내가 바로 그 말의 반대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는 철저하게 나에게 애정이 없었고 넌 한심한 놈이다, 앞으로 잘 될 리가 없다, 뭘 하든 성공할 리가 없다, 좋은 성적을 받을 리도 없다네가 뭔가를 잘한다면 그건 편법이나 거짓말에 의한 것일 것이다라는 식이었다. 물론 그런 말들 때문에 여전히 고생하고 있고 심리상담도 받고 있다.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고 자살도 하지 않았으며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고 아마 그 쓰레기같은 부모가 나를 떡잎 때부터 짓이기지 않았으면 더 놀라운 성취를 이뤄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그런 부당한 약자를 향한 올곧은 폭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도 행사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다.


장 박사의 말대로라면 부모에게서 어떤 약간의 애정도 받지 못한 나는 지금쯤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말이다. 


나는 내 영혼의 형제들처럼 되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행위에 동감하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와 슬픔과 통곡과 비탄에 대해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되는 것을 거부했고 저항해서 여전히 사회에서 잘 살고 있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가 있고 누군가를 해쳤기에 더 이상 아무에게서도 동감이나 동정을 받을 수 없는, 정말로 철저한 고독의 우물에 갇힌 꼴이 된 그들의 인생에 대해서도 슬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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