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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Dec 01. 2020

아동학대 가해자의 마음 되어보기

내 아이를 때리는 나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수능 전날, 나는 내 아이를 다섯 시간 때렸다. 

준환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능 전날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는 며칠 간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조금 피어나 있었다. 수돗물만 주다가 오랫만에 생수를 넣어준 개운죽의 색깔이 푸르게 짙어지는 것처럼, 한참 동안 물도 안 주고 방치했던 식물에게 스프레이로 수분을 뿌려 주면 잎사귀가 빳빳해지는 것처럼. 아이란 신기할 정도로 유연성이 있는 존재다. 그것은 그가 아이를 마음 놓고 때려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애들은 금방 나으니까. 성장 호르몬 덕인지, 아무리 칼을 들고 설치고 주먹을 먹이고 무기로 때려도 얼마 뒤면 멍자국과 칼자국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동학대 폭력범이 살기에 무척 편리한 나라였다. 바깥에 가서 남에게 맞은 것은 엄하게 다스려도, 친부모에게 맞은 것은 어디 가서 하소연을 못하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는 그에 대해서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아동성폭력범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별로 많은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화가 나를 위해 많은 그루밍을 해주었습니다.”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문화적으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동학대 역시 비슷했다. 유교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을 버텨 왔던 나라인 만큼, 이 나라는 효는 강조해도 부모의 도리에 대해서는 거의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부모란 신성 불가침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의무는 희미하고 권리는 강대했다. 자식을 세상에 내 보낸 창조자인 만큼, 자녀를 어떻게 괴롭히고 학대해도 목숨을 준 은혜에는 비할 바가 없다는 식이었다.


준환에게 있어 집이란 너무도 행복한 장소였다. 그는 일이 끝나면 재빨리 여섯시 전후에 집으로 갔다. 그를 기다리는 전용 샌드백이 있기 때문에 그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곤 했다. 물론, 샌드백이 늦게 집에 오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늦게 집에 가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온갖 종류의 아픔을 주며 톡톡히 가르친 결과, 샌드백은 학교가 끝나면 제깍 집으로 와서 그를 기다렸다. 샌드백은 어딘가 착각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말을 잘 듣고 자신의 기분을 살펴 비위를 맞추면 폭력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에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고작 십대다. 폭력에 맛들인 인간이 스스로 깨우쳐서 그만두지는 못한다는 엄숙한 진리를 그 아이는 아직 알지 못한다. 


물론 그는 업체의 사장으로써 직원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권력은 언제나 한계가 있었다. 그는 노동법을 증오했다. 자신의 발 밑을 기어다니는 인간들이 목소리를 가지는 일이 싫었다. 그의 자아는 항상 허기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 폭력을 휘두르고 모욕을 줘도 아무도 자신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길에서 만난 생판 남에게 했다면 아마 뺨을 얻어맞거나 고소를 당해 몇 백만원은 물어줘야 했을 욕설을 대놓고 해도, 남이었다면 몇천 만원의 합의금을 줘도 형사처벌을 면할 지 어떨지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아이를 괴롭혀도, 아이는 텅 빈 눈으로 울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처를 하는 법을 모른다. 그 아이를 겁주고 모욕하는 것만으로도 돈이라도 번 기분이 되는 건 그래서일 거다. 


아아, 인생이 이토록 살만한 것이었다니.


알콜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섹스 중독…. 중독의 종류란 다양하다. 그러나 세상은 알려진 종류의 중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어떤 형태로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중독에 대해서는 아직 명칭을 발견하지 못했다. 준환은 그러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학대 중독이다.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맨 처음에는 한두 번 맛보기 식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별 재미를 못 느끼기도 했고, 다른 활동에 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의존하게 되었다. 이제 아이를 욕보이지 않고는 하루를 알차게 보낸 기분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이었던 것이 일주일에 한 번이 되고, 일주일에 두세 번이 되고, 다섯 번이 되고, 매일이 되는 것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모든 욕망이 그러하듯 학대의 욕망 역시 에스컬레이트하기만 하지 줄어들지는 않는 것이다.


경찰 역시 그의 편이었다. 물론 준환이 경찰에게 한 말은 언젠가 아이가 어딘가에 신고를 하면 이런 변명을 하자고 생각해두었던 것이기 때문에 철저할 정도로 완벽하고 꼼꼼했고, 그 점에서 상대에게 먹힌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를 사방에 묻힌 채로 힘없이 누워있는 처참한 상태의 아이를 보고 병원을 부르기는 커녕 ‘멀쩡하네요’라면서 웃음짓는 경찰 역시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집에 가면 자기 자식들을 때릴 지도 모르겠다고, 준환은 그와 새하얀 미소를 교환하면서 같은 종류의 인간들 특유의 향기를 희미하게 느꼈다. 


그랬기에 아이가 성적을 잘 받아오는 것도 그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식이 아니었다. 말하지도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의 폭력을 감내할 샌드백이지 인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는 아이를 인간으로 기르지 않았다. 인간으로 길렀다면 대화를 시도했겠지만 대화 조차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아이가 멋대로 말을 하고, 멋대로 괜찮은 성적을 받아오다니. 그렇게 떳떳하게 사회의 일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자신이 키우는 전용 가축이 감히 인간의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울타리를 뚫고 벗어나버릴 것만 같은 초조감이 그를 에워쌌다. 안 돼, 자라서는 안 돼, 잘 되어서는 안 돼, 좋은 결과를 내서는 안 돼, 잘 살아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내가 너를 더 이상 패면서 놀 수가 없잖아.


수능을 앞둔 며칠간은 그야말로 그같은 고민의 최절정이었다. 수능을 못 보게 하고 싶다는 것이 준환의 진실된 바램이었지만, 이미 아이는 십대 후반이다. 수능을 못 보게 한 부모로 행정처분을 받거나 이웃의 주목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그는 아이가 어렸을 때 집으로 찾아온 담임선생 때문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친권도 공권력도 없는 고작 초등학교 교사인 그는 샌드백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뺏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학년이 바뀔 때까지는 조심했지만, 준환은 이미 학교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내년 되서 다른 학년 다른 반 학생이 되면 그와 같은 관심도, 관심의 권리도 없어진다. 내 자식 내 맘대로 하는데 왜 다른 학년 선생님이 와서 x랄이냐고 고함을 올려붙이면서 쫓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갈면서 일 년을 기다렸고, 일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주먹쥔 손을 여린 피부에 아무렇게나 꽂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수능을 보게 되면 대학에 갈 수도 있다. 성적이 잘 나오면 어떻게 되지? 준환은 샌드백이 대학에 간다는 상황 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십오 년 간 너무나 즐거웠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기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말이 법인 줄 아는 조그마한 아이를 제 마음대로 하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나날. 이대로 너무나 행복한 데 왜 자꾸 상황이 바뀌는 것일까?


샌드백이면 샌드백 답게 취직이라도 해서 공장 바닥이라도 쓸면 된다. 그렇게 번 돈은 모두 나에게 바쳐야 한다. 그것이 그가 가진 샌드백의 효용성이었다. 대학에 간다고? 그럼 그만큼 이 인간 같지 않은 생명체에게 등록금 같은 목돈을 투자해야 될 수도 있다. (물론 줄 생각은 없었고, 당연히 주지 않았다. 결국 샌드백은 모든 돈을 알아서 해결했다. 뭐, 응당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취직하면 당장이라도 돈을 뜯어낼 수 있도록 오랜 세월 길들여놓았는데, 대학 갔다가 머리가 틔여서 도망치면 어쩌란 말인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수능을 못 보게 할 수 없다면 수능을 망치게 하면 된다. 

결국 준환이 낸 결론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수능을 망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수능 전날에 주목했다. 전날에 밤새 때리고 고문하면 제아무리 성적이 날고긴다고 한들 가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풀이 죽어서 돌아올 거고, 취직하겠다고 하겠지. 나 같은 건 역시 수능을 볼 만한 축에도 못 들었다고. 나는 역시 당신같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 이하의 가축이었다고, 나 같은 것을 수능을 볼 수 있게끔 허락해 줘서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하겠지? 


몇 번 아이의 엄마가 공부를 잘한다고 언급하면서 앞으로는 때리지 말고 이 아이를 잘 건사해서 잘 이용해 보자고(정말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말했기 때문에 한두 번 고민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글쎄다. 당장 돈이 보이는데 사 년을 투자해서 기다린다는 걸 그는 하기 싫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인간이 아닌 존재 답게 굴면 되는 거다. 가축은 가축답게, 여름 날의 벌레는 벌레 답게, 샌드백은 샌드백 답게 말이다. 그리고 그 손맛을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야들야들하게 손에 착 감기는 고통의 촉감 말이다. 남의 고통은 나의 즐거움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사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아이의 고통과 일그러짐과 슬픔과 괴로움을 보는 순간, 그 모든 것을 기쁨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저것은 나의 영혼의 배터리나 마찬가지야.


다섯 시간 반. 


준환은 떨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이의 머리통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겁에 질려서 자신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샌드백은, 지금 준환이 환희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겠지. 시계를 힐끔 보니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이제 넌 망했다. 넌 더 이상 구제할 방법이 없을 거다. 일생 일대의 기회 좋아하네. 넌 그걸 망쳤기 때문에 앞으로도 실패자로 살아가게 될 거야. 꼴 좋다.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실패자로서 수그리고 있어야 축구공처럼 자신의 발로 계속 차면서 놀 수 있지 않겠는가. 무식하게, 능력없이 살아가야 내 말을 하늘처럼 받들겠지. 준환은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질린 것처럼 아이를 마지막으로 패대기친 다음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술을 마시고 샌드백을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같은 즐거운 유희를 멍하고 불투명한 시야로 놓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누군가를 때리는 것도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피곤해서 금방 잠들었다.


그가 깬 것은 오후 12시가 지나서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잔 데다, 전날 목적했던 바를 이루고 침대로 향한 덕분에 머리가 산뜻하고 몸도 상쾌했다. 샌드백은 시험 치러 가고 없었지만, 그는 여유만만했다. 그렇게 지독하게 패놓았다. 정신이 있었을 리 없다. 샌드백에게 시험을 잘 치뤘냐고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계획대로 되었을 테니까. 잘 치뤘을 리 없잖은가.


준환은 기지개를 켜고 킹 사이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고급진 무언가를 몸에 걸치고 사용하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옷을 버리기 일쑤였다. 최근에는 침대에 누워서 티비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거실용과는 다른 침실용 티비를 구매했다. 앙증맞은 사이즈지만 꽤 비싼 값을 치렀다. 리모컨을 누르자, 수능날에 관한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멘트가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입을 삐죽였다. 며칠 전 샌드백이 그를 잠시 쳐다본 것을 떠올렸다. 수능을 앞두고 준환은 일부러 샌드백을 때리지 않았다. 그래도 수능 직전이니까 때리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하고 안심하는 게 보였다. 우스운 착각. 그 앞에 어떤 것이 마련되어있는지도 모르고, 씩씩하게 성실하게 시험 준비를 하다니. 그런 헛수고를 하다니. 역시 아이는 아이일 뿐 어른의 머리를 넘지 못해. 준환은 킬킬대면서 웃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을 망가뜨리는 기쁨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영화를 보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댄다. 무너져내리는 주인공의 얼굴을 보라. 웬만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거기에서 간신히 인질의 생명을 구출해 내는 것으로 끝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을 보러 영화관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독립영화관이나 예술영화관 같은 곳에 가겠지. 악당들은 사람의 약점을 어떻게 쥐고 흔드는 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이 얼마나 쾌감을 주는 지도 알고 있다. 그들은 영리하고 특별한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별 관심 없던 사람, 직장에서 자주 마주치긴 하지만 감정적으로 엮여 있지 않은 사람의 관자놀이에 총을 들이대봤자 재미있는 꼴은 못 본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얼굴에 떠오를지언정,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는 절망에는 빠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만족감을 준다. 그 얼굴에 떠오른 절망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에 대한 평가를 철저하게 주관적으로 일그러뜨린다. 수면 위에 퍼뜨린 파문이 물가의 끝에 닿을 때까지 울림을 지속하는 것처럼. 그 얼굴에 드러난 공포는 자신의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니까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겁을 줘서 내 자아를 채울 자양분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간신히 하루를 버텨내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자신은 불쌍하다. 준환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불쌍하고 특별하고 연민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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