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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Dec 18. 2020

'나만이 없는 거리'로 본 아동학대 -1

음식에 얽힌 원한



‘나만이 없는 거리’는 아동학대를 다룬 애니메이션이었다. 주인공은 리바이벌(회귀) 능력이 있는 사토루이지만, 사실 히로인이자 진주인공은 히나즈키 카요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친모에게 학대를 당하고, 학대를 피하기 위해 집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다가 여자 아동을 타겟으로 한 범죄에 노출되어 사망한다. 사토루가 29살 때까지 해당 사건을 억압하고 있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회귀, 즉 해당 사건을 발굴하여 진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게 작품의 메인 줄거리다. 아동학대가 구성요소 중 하나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추리물이자 서스펜스, 루프물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매력을 다른 요소에서 찾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사토루가 카요를 죽인 범인과 대결을 펼치는 장면, 범인이 거미줄이 보이는 인간을 찾아 다니는 장면 등도 흥미롭긴 했지만,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부분은 역시 히나즈키 카요가 메인으로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원래 히나즈키 카요는 학대의 부작용으로 아동범죄에 노출되어 사망하지만, 사토루가 당시로 회귀하여 그녀의 사망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결과 나중에는 상처를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민다. 그리고 이같은 서사의 과정에서 그녀의 상처가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 부분이 독자의 감동과 눈물을 불러일으키는 포인트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세 가지 꼽으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이 먹었던 식사에 애정이라곤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히나즈키 카요의 내면을 몇 초만에 구성한 장면이었다.


주인공의 집에 와서 학대를 받지 않는 집안의 분위기를 하루 정도 맛본 아이. 물론 그것만으로도 어안이 벙벙하고 멍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집이란 감옥, 간수가 있고 내 행동 하나하나를 제어하지 않으면 곧바로 체벌이 날라오거나, 혹은 체벌이 아니라 본인의 몸 전체가 들려 날아갈 수도 있는 장소로 여기고 있던 카요에게 주인공 사토루의 집이란 신기한 장소였을 것이다. 아마 그것만으로도 밀려오는 감정이 있었을 터다. 그리고 다음 날에 받아든 밥상 앞에서 카요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전에 카요가 받아든 밥상이란 조촐한 것이었다. 빵 한 조각, 컵라면, 그도 아니면 사먹으라는 듯 놓여진 동전. 물론 식사는 제대로 챙겨 주고서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하는 집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무관심을 받아본 아동학대 피해자는 슬프게도 흔하다. 애정이 없음, 무관심, 꼴 보기 싫음, 귀찮게 생각함의 대표적인 증표로 나타나는 것 중 하나가 부실한 밥상이다. 상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손이 많이 가고 에너지와 정성을 쏟아야 하는 맛있는 밥을 내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조촐한 밥상은 가난의 증거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흔한 것일수도 있다. 조촐한 밥상, 부족한 밥상 그 자체는 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의 악의나 철저할 정도로 잔인한 무관심의 증거일 때는 그것에 링크된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은 소식이 끊어졌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남과 좀 다른 어린시절을 보낸 남자 하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계란 프라이가 그렇게 좋더라고. 내 부모는 나에게 계란 후라이를 해 주지 않았거든. 형에게는 해 줬는데, 나한테는 계란 프라이도 아까워했어. 그래서 형의 밥그릇 위에만 올라가 있는 계란을 한없이 바라보곤 했어. 형은 나에게 나눠줄 생각을 하지 않았지. 그게 머리가 얼추 자랄 때까지는 계속 그랬어. 가난한 집도 아니었는데, 그냥 나에게는 그 얄랑한 계란 프라이도 주기 싫었던 거야. 그래서 이상하게도 지금도 계란 프라이만 먹으면 그렇게 대접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상하지. 심지어는 나에게 계란 프라이를 누군가가 해 주면 그 사람이 갑자기 좋아져.”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쉬운 남자네. 계란 프라이 하나로 꼬실 수 있다니.”

“그렇지? 지금 여자친구도 그래서 만났어. 그녀 집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아침에 계란 프라이를 해주더라니까.”

부모에게 애정을 받지 못하면, 남에게서 별 것 아닌 호의로 대우를 받아도 곧바로 마음이 쏠려버린다.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쉽게 좋아한 나머지 호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 이야기 및 대처방안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 역시도 그러한 과거가 있다. 나의 부모는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뭔가 좋은 음식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밥상은 카요와 마찬가지로 부실했다. 단, 집안에 행사가 있거나 ‘아버지’가 본인이 먹고 싶어했던 반찬-장어,낙지,갈치,한우-를 사온 날에는 나에게도 좋은 음식이 돌아올 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날은 밥을 먹는 내 앞에 앉아서 몇 마디 시비를 걸고,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하면 밥상을 엎어버리거나, ‘역시 너는 이걸 먹을 자격이 못 돼’라면서 그 얄랑한 반찬을 거둬가버렸다. 제대로 된 대답이란 ‘이런 대단한 식사를 저 (따위)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다양한 어레인지를  여러 번에 걸쳐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다른 집에서도 이 같은 일이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원래 자식이란 부모와 같은 반찬을 먹을 수 없으며, 혹시라도 같이 먹게 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며, 그러나 그나마도 지나치게 내 격에 걸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으레 노성과 함께 빼앗겨야 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나는 학대 가정을 벗어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내 경험이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려, 아이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주는 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만이 없는 거리의 히로인 카요는 직관력이 뛰어나다. 초등학생인데도 자신에게 주어져 왔던 부실한 밥상에 숨어있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에 대해 슬픔과 서글픔, 쓸쓸함, 고독감을 느낀다.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아이임에 틀림없다. 난 한참 지나서야 무엇이 다른 것인지 깨달았으니까) 

그렇다. 그것은 분명 서글픈 일이다. 내가 당해왔던 일이 평균적인 집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학대가 이루어졌던 때보다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한참 적을 향해 포탄을 던지고 참호 옆에 숨이 멈춰버린 전우를 쳐다볼 때는 그것이 잔인한 지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땅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치뤄졌던 모든 것이 그저 잔인한 살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듯, 평화롭고 건전하고 평범한 일반 가정의 한 면목을 들여다보는 순간이, 가해자의 발에 채인 반동으로 벽에 부딪친 직후의 순간보다 훨씬 더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중요하다. 필요하다. 문명과 평화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한 첫걸음이다. 시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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