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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Jan 29. 2021

감히 아버지라는 명칭을 쓰다니

수년 전 유행했던 태국의 한 생명보험 광고.



비록 광고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내용이 좋다면서 감동의 댓글을 남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라서 딸과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엄청나다. 그는 딸의 생일에 초록색과 흰색의 콜라보레이션이 돋보이는 생일 케이크를 마련하고 ‘귀가 안 들려서 미안하구나’라고 말하려고 준비까지 하는데. 딸은 아버지가 청각장애인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화가 난 나머지 자살 시도를 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수혈을 해서 심장이 멈춘 딸을 살려내고 부녀가 화해한다는 이야기다.


좀 오래된 영화지만 아이엠 샘이라는 영화도 있다. 2001년 개봉한 영화인데 지적장애로 7살 지능을 가진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다. 그는 딸에게 사랑을 퍼부으며, 그 사랑을 알고 있는 딸은 아버지보다 똑똑해져서 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수업을 게을리 하게 된다. 두 사람의 마음이 너무 애틋하지 않은가.


테이큰이라는 영화도 있다. 2008년 영화로 리암 니슨이 주연이다. 특수요원으로 열심히 일하다보니 가족과 멀어져버린 아버지가 인신매매를 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영화다. 특수요원으로 살았던 경험과 지식과 노하우를 살려 딸을 납치한 조직을 깨끗이 발라버리고 구출하는 내용인데, 모든 공격을 일격필살로 끝내는 통쾌하고 시원한 액션과 딸과의 감동적인 포옹으로 마무리되는 가족 중심적인 마무리로 큰 호응을 받았다. 덕분에 속편도 두 개나 더 찍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런 글도 올라왔었다. 야근을 하고 집에 올 때마다 항상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한참 기다리지 않아서 편했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누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인지 궁금했다. 범인은 바로 아빠였다. 야근에 지친 딸을 빨리 쉬게 해주기 위해서, 퇴근시간이 가까워오면 베란다에서 무려 ‘대기’하며 딸이 집 근처에 오고 있는지를 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아버지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보았다. 도무지 위에 그려진 사람과 나의 아버지는 일치되는 공통점이 없다. 나의 아버지는 따스함이라고는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그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건 악에 받친, 살의에 가득찬 핏발이 선 눈동자다. 그는 나를 죽이기 위해 온갖 것들을 행했다. 15층에 있던 우리 집 베란다에서 나를 밀어버린다던가,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던가, 칼을 들고 설친다던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진다던가, 망치로 내 방 문을 부순다던가, 반대로 가둬버려서 내가 내 방에서 ‘알아서’ 소변을 봐야 했다던가, 수능 날에 시험 잘 보지 말라고 몇 시간을 때린다던가, 무슨 방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등뒤에서 후려치는 바람에 기절했다던가, 그 혹이 아직도 내 머리에 있다던가 말이다.


당신에게는 저렇게 고귀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아버지’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아.


그렇지만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명칭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납득하기 어렵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머리카락에 붙은 껌이나, 열을 너무 가해 냄비 바닥에 늘러붙은 음식물이나, 머리카락이 잔뜩 껴서 갈색 이물질과 함께 엉켜 있는 하수도관처럼 찜찜함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상담이나 자조모임에서 그를 ‘괴물’이나 ‘쓰레기’로 부르곤 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점은 그 모임이 아버지가 가해자인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던 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내 태도를 보며 혐오감을 느꼈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전해들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해도 좋다. 일말의 애정일지라도 상대에게 전할 의지가 있는 존재와, 상대를 그저 물건 취급하고 함부로 대하는 존재가 같은 단어로 명칭된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도 부당한 느낌이다. 그 남자가 감히,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은 명칭을 사용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화목한 집안의 태생들, 아버지가 무뚝뚝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럭저럭 온전한 애정을 간간히 던져줬던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들, 차별이지만 학대는 아니었던 아이들(물론 그래도 그것이 마음에 상처를 줬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말이다), 갈등은 있지만 그것이 일시적이거나 성격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상대방이 자신의 키의 반토막도 되지 않는 아이를 문자 그대로 ‘들어서’ 시멘트 바닥에 던지거나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나의 존재, 표현,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에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구조다. 이해한다. 나는 그들의 아버지를 욕되게 하려는 게 아니고, 내 아버지는 그들의 아버지와 전혀 다른 존재지만, 그들은 내가 아버지 를 ‘쓰레기’라고 지칭할 때 그들 자신의 가족을 욕되게 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남이 괴로워하는 걸 보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트가 아니다. 그래서 멈춘다. 나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도대체 내 입을 막고 있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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