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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Feb 08. 2021

워킹데드의 캐롤



그녀는 나의 히어로였다.


AMC드라마 워킹 데드는 2010년에 시작했다. 현재는 시즌8부터 시청률이 추락했고, 나 역시도 반복되는 대결구도와 낮아진 흡입력, 이름뿐인 좀비들의 영향력 때문에 조금 권태기가 온지라 10기 1화까지만 보고 멈춘 상태다. 그래도 11기에 마무리가 된다고 하니, 마치 미드 원헌드레드의 끝이 어떨지 궁금해서 꾸역꾸역 보고 마침내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믿는 게 내 시간을 세이브했겠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완결까지는 달리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캐롤 펠레티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캐롤의 인기가 높은 지는 모르겠으나, 본고장 미국에서 그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라서 주인공인 릭 바로 다음을 찍는다. 강력하고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정의감 넘치고 표정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카리스마를 내뿜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제치고 왜 캐럴이 1위를 차지했을까? 


사실 캐롤이 극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거의 강력병기, 최종병기에 해당한다. 일행이 위험에 빠졌을 때 나타나서 일당백의 전투력을 선보이는 것은, 5기 1화에서 극대화되었지만 그 전후로도 여러 번 목격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입체적이라서 현실에 존재할 법한 캐릭터성, 극에서 가장 최절정이라 보이는 폭발적인 성장, 강력한 전투력 등일 것 같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녀가 초반에는 에드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가정폭력에 대한 드라마가 아니라 좀비에 대한 드라마다 보니 자세하게 파고들지는 않지만, 아마 그녀의 남편 에드는 꽤나 긴 세월동안을, 그리고 지금은 좀비 아포칼립스때문에 어느 정도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는 아마 더 지독하게 때렸을 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러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를 겪은-학대나 방임, 성폭력 등-사람의 경우 너무나 안타깝게도 배우자로서 폭력성이라는 결함이 있는, 혹은 그와 맥락적으로 닮은 문제점이 있는 사람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녀는 에드가 죽고, 하나 뿐인 딸 소피아가 죽고 나서 방황하다가 이내 워킹데드 월드에 잘 적응한다. 적응하다 못해 아예 능수능란해진다. 그녀가 전염병 사태를 막기 위해 두 명을 미리 죽이는, 도덕적으로 논란 있어 보이는 하지만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것도 놀라운 변화였다. 아이들에게 환상과 동화보다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킬 칼을 가르친 것도 그녀였다. 도중에 한 아이가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보이자 그 아이의 목숨을 거두는 것마저도 초반의 그녀를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나는 분노가 그녀를 전사의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분노가 있다. 아마 어렸을 때나, 혹은 성인이 되어서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들도 이걸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고통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가볍게든 무겁게든 입 밖으로 던져놓을 수 있는, 그랬을 때 상대가 경악에 차거나 고통스러워서 외면하지 않고 담담하게 반응할 수 있는 종류에서 벗어난 것 말이다. 그들은 그 이야기를 꺼내놓은 내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한 연약한 자신의 멘탈을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연락을 끊는다.


입 밖에 내놓으면 고통의 크기가 줄어든다.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 이 말의 뜻은, 단순한 표출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공감하고 이해하는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쓸데없는 수치심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는 그런 악당만 있는 게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섬세하고 착한 사람도 있다는, 세상에 대한 신뢰까지 되돌려받을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그 같은 시도가 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고통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상담자를 만나서 털어놓고는 있다. 하지만 상담자는 만들어진 공감이다. 그들에게는 ‘불편하다,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 이 주제는 다시는 꺼내지 마라’ 라고 반응할 선택지가 없다. 그와 같은 선택지가 상담 윤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렇기에 고통은 줄어들지만, 세상에 대한 신뢰는 회복되지 않는다. 


캐롤이 극중에서 에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은유적으로 데릴과 이야기하는 것 한 번 빼고 말이다. 좀비 드라마라서 좀비에 초점이 맞춰져서 그렇다고?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평소에 캐롤이 사람들과 하하호호 웃는 자리에서 에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자신이 몇 년이나 남편에게 맞았던 과거가 있었다고 가볍게 얘기할 수 있을까? 


그 분노는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 평화로운 세상이었으면 캐롤은 그 분노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아포칼립스적인 세계에 살고 있었다. 


평화로운 문명 사회에서야 분노를 커다란 검은색 복싱 샌드백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리고 베이킹을 하고 취미에 몰두하는 식으로 에너지를 전환한다거나 해서 달랜다. 아무래도 직접적이지 않으니 분노의 독을 빼내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좀비가 걸어다니는 세계에서는 이 분노를 가감없이 표출할 수 있다. 그래서 캐롤은 극 중 혼자서 좀비가 걸어다니는 바깥을 헤메며 분노를 표출하면서, 몇 년 뒤에 ‘최종병기’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갈고 닦는다.


그녀는 나의 롤모델은 될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좀비바이러스가 돌거나 하지 않는 이상, 내가 내일부터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했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들을 죽이며 살 일은 없을 테니까. 


뭐, 하나는 확실하다.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나는 잘 적응할 수 있다.

몸 속 내장이 튀어나오는 끔찍한 시각적인 혐오감이나 괴성, 피냄새, 그런 것들에 익숙하진 않으니까 아마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가 없어 보이는 현실에 좌절하거나, 좀비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아가느니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희망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절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둡고 처절하고 살벌하고 광폭한 매일매일을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남긴 하울링으로 거의 평생을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바베트 로스차일드가 쓴 트라우마 탈출 8가지 열쇠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생존자들은 위험한 것에 대해서는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위험하지 않은 것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이는 그들이 일상생활을 위협한다.’ 물론 이는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생존을 위협할 수 있지만, 오히려 생존률을 높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좀비들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아 침착함을 유지한다던가, 사람들이 못 보는 위험을 미리 감지한다던가 하면서 말이다.


다시 현실로 되돌아와보자. 갑자기 좀비바이러스가 퍼질 확률은 아마 높지 않을 테니 작금의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을 뒤돌아 보면, 나는 놀랄 만큼 금방 적응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도 갑갑하지 않았고, 답답하다거나 못 참겠어서 마스크를 좀 벗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변이 문제도 있으니 이 사태가 빨리 마무리지어져야 하는 것은 인류의 존속을 위해 당연한 일이지만, 설령 이 상황이 몇 년 더 지속된다고 해도 나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이 위험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몇 개월이 지나자 기정사실화되어 보건계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혹시 이것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의 장점인 걸까? 나도 캐롤처럼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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