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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Feb 17. 2021

나의 영웅 토리 에이모스

그녀는 오래도록 나의 영웅이었다.


한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서관을 아무리 뒤져도, 성폭력을 당한 여자가 씩씩하게 살아갔다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그래서 울었죠.


이런 내용이었는데,

문장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문장에서 그의 생생한 비명을 느꼈다.


역사는 패자의 것을 기록하지 않고, 승자의 시선에서 패자가 잘 한 내용도 승자의 승적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폭행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도 비슷한 매카니즘으로 발동한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제2인자, 낮은 성원권을 갖고 있다보니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여성의 잘못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다른 폭력과 달리, 피해자의 행실을 그토록 문제삼게 된다. 사기 피해자에게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떻게 굴었길래 사기 대상을 물색하고 있던 사기꾼의 눈에 띄었어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다니면 사기 범죄의 타겟이 되죠? 혹시 사기를 당한 다음 사기꾼을 경찰에 넘겨서 합의금을 받으려고 이 모든 것들을 (혼자)계획한 건가요’라고 묻지 않는데 그와 같은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게 아직까지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 지점이 소름끼친다. 도대체 몇 년에 걸쳐서, 몇 백 몇 천 번에 걸쳐서, 몇 수십만 명이 그런 식의 폭력을 저질러 왔기에 우리는 그것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 때 그런 ‘자연스러움’을 벗어난 가수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Tori amos다. 

곡도 잘 쓰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감추지 않고 심지어 그걸 활용해서 곡까지 쓴다. 


그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영미권이 이런 영역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곳의 여권이 우리나라를 훨씬 뛰어넘어서 동등한 지점에 와 있는 것도 아니다. 무례한 사람들의 불편한 농담을 빙자한 비아냥과 멸시와 조롱은 흔히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곡을 만들어서 가해자를 두고두고 자신의 곡 안에 박제해버렸다. 다음 곡이 한 예다. (이 곡 말고도 있다.)


Blood roses

Blood roses

Back on the street now

Can't forget the things you never said

On days like these gets me thinking

When chickens get a taste of your meat

Chickens get a taste of your meat

You gave him your blood

And your warm little diamond

He likes killing you after your dead

You think I'm a queer

I think you're a queer

I think you're a queer

Said I think you're a queer

And I shaved every place where you been

I shaved every place where you been

God knows I've thrown away those graces

The belle of new orleans tried to show me

Once how to tango

Wrapped around your feet wrapped around like good little roses

Blood roses

Blood roses

Back on the street now

Now you've cut out the flute

From the throat of the loon

At least when you cry now

He can't even hear you

When chickens get a taste of your meat

When he sucks you deep

Sometimes you're nothing but meat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피디아


뭐, 곡의 가사 속에 ‘사이다’는 없다. 가해자를 찾아서 복수를 하겠다던가 했다던가 언젠가는 한다던가 하는 분노를 반영한 문장도 없다. 사실 그대로를 적었다. 상대가 자신을 인간이 아닌 ‘고기’로 취급했다는 명료하고 슬프고 비인간적인 사실 말이다. 그러나 이 곡을 들은 사람은 알 것이다. 그녀가 그 기억하기 싫은 내용의 사건을 분석해서 파괴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제 3자의 시선에서 재조합하여 가사로까지 구현했다는 것을 말이다.


토리 에이모스의 재능과 그녀가 해 온 것들에 비해서 그녀의 명성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편한 주제를 말하는 것도 아마 그 중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건, 그녀가 해낸 복수가 대단하지 않은가. 63년 생인 그녀는 아직까지도 멀쩡히 잘 살아있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가해자의 이름은 그가 해낸 범죄의 강렬함에 빛이 바랠 것이며, 그가 토리파일(Toriphile)이라는 팬층이 있는 그녀의 신곡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술집이나 카페를 가는 횟수를 줄이거나 라디오나 TV를 보지 않거나 해야 할 것이다. 향후 일론 머스크가 열일해서 특정 키워드를 아예 내 생활에서 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도 생기지 않는다면 그의 일상은 계속 불편하겠지.


보통 어떤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루트는 그리 밝은 게 아니다. 나처럼 중독과 자기 파괴와 자기 비하와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기능을 하지만 괴로워하기도 하고, 정신병으로 앓기도 한다. 토리 에이모스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고 심지어 공연장에 나타나서 엄청난 수의 관중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노래까지 한다. 그것도 본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그대로 가사로 만들거나 혹은 은유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영웅이다. 그 어떤 재능있고 역경을 이겨내고 어려움을 참으며 특정 경지에 도달한 사람보다, 나는 그녀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토리 에이모스가 살아 있고 멀쩡하며 웃기도 하고 제 인생을 살고 아이까지 낳아서 그 아이가 벌써 토리만큼 키가 큰 데다 계속 예술 활동을 하고 여성들을 위한 단체까지 만들어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간간히 들을 때마다 안심이 된다. 그녀가 장수했으면 좋겠다. 그녀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존재다. 


도서관을 뒤져도 성폭행 피해자가 잘 살아갔다는 책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건 살아가지 못하고 다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괴롭게 살아있거나 혹은 잘 살아있는데도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미디어에서 그들에게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고, 보도하지 않고, 알리지 않고, 없는 것처럼 군다고 해서 그들이 지워지는 건 아니다. 찾아보면 어딘가에 그들에 대한 정보가 반드시 있다.


물론 단순히 불편해서뿐만은 아니다. 먼 옛날도 아니고 최근인 작년 11월의 일이다.  무려 공공에게 중립적인 지식을 아낌없이 전달해야 할 ‘공공도서관’에서 ‘나는 김지은입니다’를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온갖 종류의 도서에 대해서 거의 반려 없이 희망도서 신청을 해주는 게 공공도서관인데, 왜 이 책을 거부해 놓고는 ‘다른 도서관에서 빌리면 된다, 상호대차로 이용할 수 있고, 광고성 도서로 판단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변명을 붙였을까?


공무원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이와 같이 처리한 공무원은 중립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여성 인권을 배제하고 싶다'는 정치적 색깔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 아닌가? 그러나 해당 공무원이 무슨 경고나 지도를 받았다는 소식이 없다는 것을 보면, 해당 공공기관은 물론 그를 관장하는 청에서도 같은 입장이라는 뜻인가?

이 사회가 한 목소리로, 피해 입은 여성의 목소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혹은 거부하고 있다는 결론은 조금 성급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경향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고도 입막음을 당했기 때문에, ‘혹시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도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있나’라면서 도서관을 들러서 정보를 찾고 인터넷에서 사례를 찾아보다가, 이윽고 ‘다들 이 역겨움과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나보다’라면서 더욱 괴로워하게 되는 성폭행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 사람의 우울은 그가 못나서, 약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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