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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소설가가 되었다.

by Mynameisanger

https://youtu.be/xKcBpMxuR44

오늘 만든 따끈따끈한 데모곡입니다.



그 애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 애를 처음 본 것은 둘 다 스무살일 때였다. 요즘 가만히 있어도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그 애의 이름. 그 아이는 성공했다. 소설가로서.

나는 그 아이가 북토크를 하거나 인터뷰를 하는 것을 종종 보곤 했는데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소설가란 내 기준으로 상당히 어렵게 소통하는 인간들이다. 정확히 원하는 바를 한줄로 쓰지 않고 은유하고, 상징하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말하고, 말하지 않고, 반대로 말하고, 꼬아서 말한다. 그러면서 표현만은 유려하고 쓸데없이 많은 단어들을 소비한다. 효율로 따지자면 비효율의 극치인 소통법. 그래서 그들이 세상에 내놓은 그들의 영혼은 똑바로 출력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잘못된 방법으로 출력하고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이 점이 좋다고 제멋대로 방향으로 평가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즐거우니까 계속하는 거겠지. 직선적으로 살아온 단순한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 힘들다. 계속될수록 허무하고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소통 방법 아닐까? 무슨 심오한 종류의 매저키스트도 아니고. 아마 그래서 내가 그 애의 등에서, 아니 그 애의 입과 눈에서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을 봤나. 그런데 뭐,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소통방법이 외롭다고 생각하는 자-내-가 멋대로 그렇게 해석한 것일 뿐, 마치 바다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를 산속의 짐승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느낀 슬픔은 존재하지 않고, 내가 느낀 공감은 희극일지도.

어쨌든 스무 살 전후해서 그 애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느꼈는데 그게 범인이 비범인을 봤을 때의 예감인 건지, 아니면 애정의 예감이었는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애비에게 고문당하고 있던 터라, 그런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감정의 결을 더듬어 볼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에너지도 없었다. 그래서 놓쳤다. 그 애는 다른 사람들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나아가 다른 세계의 것이 됐다. 그래서 그 애가 나오는 무언가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졌다. 그랬건만, 자꾸 주변의 사람들이, 혹은 새로 알게 되는 사람들이 그 애의 이름을 꺼낸다. 이 작가 좋다면서. 그 애의 이름을 내 앞에서 말하지 말라고. 나는 몇 년 전부터 그 애가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라곤 했다. 인터넷과 뉴스를 피해 다니고 있는데도 이 모양이다. 내가 느끼는 것이 대체 뭘까. 꿈에서 그 애를 자꾸 본다. 보고 싶지 않은 환영이다. 반갑지 않다. 나는 스스로를 몇 번씩 다그친다. 일방적인 감정은 지우고 짓밟아야 한다고. 너에게 손해라고. 애비 애미와의 가증스런 추억을 떠올린다. 그들의 나에 대한 악의를 지워보고자 노력했던 날들을 잊었니. 그게 인간의 디폴트다. 인간은 일방적인 애정은 고마워하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애에 대해 일어나는 감정을 누르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며칠 뒤 도로 돌아와 있는 악순환이다. 누군가에 대한 집착은 그의 노예가 되는 길이다. 쳇,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테다. 나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남아있지도 않을 사람을 하염없이 일방적으로 떠올리는 건 자존심 상한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지금은 인정하는 단계다.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게 허상일 수도 있고, 나만 기억하는 호감이 있을 수도 있고, 상대에게 경멸당할 가능성이 높은 일방적인 호감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걸 생각하는 자신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언젠가는 만날 날이 올 수도 있다. 현재 생계를 잇기 위해 하는 일 중에는 예술가를 인터뷰하는 일도 포함돼 있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과연 그 애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있을까? 물어보고 나서 아, 그런가요, 하면서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고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는 어색한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허무한 질문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질문 따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데 그런 날이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데 괜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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