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공들여 빚는 마음
만약 내 살점을 뜯어 그릇을 빚는다면 나는 다음 중 어떤 그릇을 빚을 것인가?
1) 공장 자동화로 만들어진 견고하고 매끈한 공산품 그릇
2)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색 있는 그릇
나의 선택은 2)번이다. 1)번은 성공을 보장하는 쉬운 방법이지만 문제를 다시 읽어보면 정답은 2)번이다. ‘내 살점을 뜯어’ 라는 말 때문이다. 내 살점은 고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므로 정성을 들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장인의 그릇을 만들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을까.
단편적이지만 나는 그릇을 빚는 일을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비유하곤 한다. 요즘 아이들은 유명 학원에서 레벨테스트를 받고, 좋다고 하는 학원은 자리가 없어서 못 다닌다고 한다. 레벨에 따라 줄을 세워 반을 편성하고 레벨을 상향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대한민국의 사교육 시장. 한국에서 태어난 내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사교육시장에서의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안타깝다. 유명한 학원을 보내 레벨테스트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내 아이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진다. 나라고 내 자식의 레벨이 높길 바라지 않겠냐만은, 어릴 때부터 치열하게 시키지는 않았으니 좋은 점수가 나올 리 만무하다. 그래서 한 번도 레벨테스트를 시켜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아이가 부족한 것은 아닌데.. 말끝이 흐려지면서 내 마음도 쓸쓸하다. 내 살점을 뜯어내는 고통을 거쳐 세상에 태어난 우리 아이가 아니던가.
아이를 흙이라고 비유할 때, 공장에 내 아이를 맡기면 아이의 소재에 따라 완성품의 종류는 달라질 것이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브랜드 그릇에도 품질과 소재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장인이 만들어 수량도 한정되고 품질이나 디자인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니크한 제품도 많이 보인다. 나는 그런 제품들에 눈길이 간다. 소재도 디자인도 특별하니까. 손으로 만졌을 때 거칠한 질감도 오히려 그 제품만의 특색으로 느껴질 것이다.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몇 날 며칠의 정성을 들여 완성된 작품. 흙이 숙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인내했을 것이다. 땀이 나더라도 내 손이 흡족할 때까지 흙을 부지런히 반죽하고 어루만졌을 것이다. 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때를 기다리며 참아냈을 것이다. 내 아이를 이렇게 빚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아이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아름다운 장인의 그릇으로 탄생하는 일. 생각만 해도 뿌듯하고 아름다운 일 아닌가.
오늘 열두 살 아들에게 수학 문제집 3장을 풀라고 했다. 피곤해서 좀 누워있는데 아들이 방에서 자꾸 외친다.
“엄마.. 이거 잘 모르겠어요…”
“엄마.. 제발 여기로 한 번만 와 봐요…”
어려운 문제집도 아닌데 왜 자꾸 불러대는 건지, 한참을 미적대고 불러도 모른척하다가 마침내 튀어나온 아이의 짜증을 듣고 방으로 향했다.
”에휴.. 뭘 그렇게 모르는 게 많아? 천천히 읽어보면 다 할 수 있으면서. “
“아니, 진짜 어려워요 엄마.. 다 틀렸을 것 같아.”
나는 아이의 문제집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제 딴에는 문제 푸는 고통을 이겨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나보다.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저런 글씨를 갈겼을까 싶기도 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펴고 이제까지 푼 문제들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세 장을 풀라고 했더니 한 장 반 만 풀었다. 그것도 몇 문제는 별표를 쳐놨다. 어렵지 않은 기본적인 문제들이라 대부분 맞았다. 잘 읽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풀 수 있는 서너 개의 문제가 틀렸다.
“아들! 이렇게 많이 맞아놓고 왜 그렇게 울상이야?”
“아니, 너무 어렵고.. 헷갈리고..”
“엄마 생각엔 지금 문제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아…이거 다 풀어야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볼 수 있잖아요..”
나는 웃었다. 그래, 지금 네가 그걸 보고 싶은 마음에 집중이 잘 안 되는구나. 알겠다. 세 장을 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한데, 그래서 조금만 어려워도 별표를 잔뜩 해 놨구나.
“오케이, 알겠어! 그럼 아들, 이렇게 할까?”
“어떻게요?”
“나머지 한 장 반은 다음에 풀고..”
이미 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 대신 방금 채점 맨 데서 틀린 문제랑 별표 한 문제만 같이 함께 볼까?”
“네! 좋아요.”
나도 컨디션이 안 좋긴 했지만 계속해서 풀라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건지는 쪽이 낫겠다 싶어 아이가 틀린 문제를 함께 풀기로 했다. 천천히 문제를 읽으라 하고, 약간의 힌트만 준 뒤 생각해 보라고 기다렸다. 마음 속에는 ‘이것도 몰라?’, ‘문제에 답이 있다고 했지!’와 같은 말들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시간을 주기로 했다.
아이는 흥분한 채로 천천히 풀어냈다. 자꾸 암산하려고 해서 종이에 적어보라고도 했다. 천천히, 차분히 답을 끄집어 낼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며 지켜봤다.
“옳지, 잘했어! 이렇게 풀 수 있는 문제였네?”
“오, 그러네요?”
눈이 동그래지며 신이 난 아들의 얼굴을 보니 귀엽다. 몇 개만 풀면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뜬 눈치다.
“이 문제는 문제를 다시 한번 소리 내서 읽어볼래?”
“이 문제는 여기에 이렇게 선을 긋고 다시 보면 어떤 것 같아?”
“이렇게 다 할 줄 알면서 네가 영화 볼 마음에 이성을 잃었나 보다. 내일은 잘할 수 있지?”
이왕 하기로 한 곳 까지는 이렇게 ‘공을 들여’ 마무리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오답정리까지 마치고 쏜살같이 티브이를 향해 뛰쳐나간 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아들도 나도, 우리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내가 지금 ‘공을 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여기까지 빨리 풀어, 힘들어도 해야 해!”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얼마 되지도 않는데 조금만 참고 해 봐!”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장인이 되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때문이다.
말로 지시하고 채근하는 형태의 노력은 아이를 공산품으로 만드는 노력이나 다름 없다. 내가 하는 것은 없고 아이에게 하라는 것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의 기분에 맞게 공부의 양을 조절해주고, 틀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는 한마디 한마디는 나의 노력이었다. 마치 섬세한 조각을 다듬는 일처럼, 부드러운 흙을 만족할 때까지 빚는 일처럼 땀이 나도록 공을 들였다. 좀이 쑤시고 입이 근질근질한 일이다. 코에서 바람이 나고 한숨나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공을 들이고 있다고 의식하면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 이렇게 공을 들여서 아이가 공부에 대한 정서가 나빠지지 않고 효능감이 생긴다면, 조금 더디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아이가 미래에 ‘최상품’은 못 되더라도 ‘공산품’이 되지 않을 것임에는 의심이 없다. 장인이 공들여 만든 작품은 인기가 없더라도 반드시 찾는 누군가가 있다. 나는 인기 많은 작품보다 반드시 필요한 누군가의 작품으로 대접받을 아이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그것이 내가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