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이버링 Aug 25. 2023

나를 괴롭힌 아이의 쓸모

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

“더러워, 만지지 마.”


Y는 자기 필통 속 하이텍 펜에 관심을 보이는 내 손을 파리 몰듯 밀어냈다. 그 순간  Y의 앞자리에 앉은 내가 전염병 환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을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 Y는 약간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비웃음이었을까. 누군가를 함부로 무시해도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스스로의 위치에 자부심을 느꼈을까. 머쓱함에 입술만 씰룩거리다 몸을 돌려 고쳐 앉았다.


수업시간, 내 무릎 옆으로 쪽지가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그걸 주웠지만 내 앞에 앉은 여자애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주웠어야 할 쪽지를 내가 주워서 굉장히 난처해하는 기색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엔 내 이름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아마도 나를 비난하는 내용이었겠지. 내 필통에는 당시 한 자루에 천 오백 원이나 하는 하이텍 볼펜도 색깔별로 없었고, 내가 발표를 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기 때문일까. 비음 섞인 코맹맹이 목소리 때문일까. 그 시절 나에게는 그들에게 있던 무엇이 없었던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주 멍청하지도 않았고 추악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이런 대우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Y를 추종하고 거들며 나를 놀리던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이 또렷이 기억난다.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어 소식을 듣거나 길 가다 본 적이 있다. 어느 누구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못나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저런 아이들에게 무시를 받았다니..’ 마음속으로 떠올리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세월은 그들을 먼 기억에 묻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 기억의 끝이 그들로부터 받은 무시가 아니었다는 것. 5학년 2학기의 어느 쉬는 시간, 나는 Y의 책상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Y를 마주하고 서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준비했던 말을 전부 쏟아냈다. 쿵쾅대는 심장이 성대에서 빠져나오는 소리를 심하게 때리는 바람에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네가 뭔데, 네가 얼마나 잘났는데 나한테 함부로 말해? 앞으로 나한테 계속 이러면 내가 진짜 너 가만 안 둘 줄 알아!“

감정이 격해져 혀가 꼬이기도 했고, 앞뒤가 안 맞는 서투른 윽박을 반복해 질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그날의 공기를, 약간은 부끄러워하던 Y의 표정을 기억한다. 내 입에서 튀는 침마저도 더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좋았다. 내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는 녀석이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교실에 흐르던 적막.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겠지.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을 때,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뚜벅뚜벅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잘했다. 정말 잘한 일이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날 대체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Y와도 나와도 친했던 내 옆자리 친구는 영웅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세상에, 너 진짜 대단하더라.’ 그녀가 내게 지은 미소가 얼마나 얄미웠는지를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최근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는 듯하다. 나는 첫 회를 보면서 고데기로 팔을 지지는 끔찍한 장면을 견디지 못해 채널을 돌렸다. 내가 받은 무시는 드라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인했다. Y와 친구들은 물리적으로 나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또 내가 친구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말을 걸면 상냥하게 답해주는 친구도 있었고, 등하교를 함께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저 ’인싸‘처럼 보였던 Y의 패거리로부터 받은 무시가 내 유년시절 상흔이 되어 남아있을 뿐이다. 이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살아있는 동안 잊히지 않을 이 기억이, 쓸모 있는 날이 올까?’


쓸모.

이 흉터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최근 이 흉터가 붉어진 적이 있다. 30년 가까이 지난 흉터가 다시 아팠다. 아들이 순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아이에 대해. 반사적으로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래, 이때쯤이지, 내가 5학년 때니까.’

아들은 누구한테 맞고 다닐 체격은 아니다. 이제껏 맞고 온 일도 없었고 물리적 괴롭힘을 외면할만한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말로 자기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을 받아낼 힘이 없는 것이다. 선생님께 일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생님께 전달되는 <괴롭히는 말들>은 화자의 표정과 억양을 잃고 식상한 말이 되기 때문이다.

“야, 너 진짜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애들이 너 다 싫어해.“


나는 아들이 전하는 <괴롭히는 말들>의 표정과 억양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 말들을 듣고 지었을 아들의 표정까지도 상상할 수 있다. 어쩐지 궁색해지는 표정과 몸짓. 열두 살의 아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일까? 그것을 내 흉터가 대답한다. 내 흉터가 쓸모 있음을 자각한 순간, 아이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 녀석, 너한테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은 모양이네. 원래 못된 사람들은 남을 까면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친구, 그까짓 거 다 필요 없어. 친구 사귀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으로 너 자신을 갉아먹지 마. 엄마에게 네가 얼마나 소중한 아들인데, 너 그딴 아이들에게 감정낭비하고 상처받으면 엄마에 대한 예의가 아닌거야, 알겠니?”


고든 뉴펠드의 저서 <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에서는 왕따 가해자들이 지배권을 쥐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배를 확립하는 방법 중 자신을 높이는 직접적인 방법은 뽐내거나, 허풍을 떨거나, 가장 크고, 잘 나가고, 중요한 사람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흔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왕따 가해자는 늘 누가 지배권을 쥐고 있는지 보여주고 아이들을 통제하는 일에 집착한다. 왕따 가해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아이에게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너에게 기분 나쁘게 말하는 아이의 의도를 위와 같이 설명하고,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면 되는지, 그리고 그 아이를 오히려 가엾게 여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아이가 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준비가 되었다. 너를 깎아 내림으로서 자신을 높이고 싶어하는 그 가엾은 아이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일로 우리가 지켜온 선한 에너지를 연소하지 말자고, 헛헛한 감정에 빠져 서로 괴로워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단단하게 쉴드쳐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과거에 내가 괴롭힘 당했던 날들의 쓸모가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아줌마를 따라 마트에 간 나의 어린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