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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Jan 10. 2024

식기세척기가 필요한 순간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쨍그랑!”


손에서 밥공기 하나가 미끄러져 개수대를 세게 박았다. 박살이 났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나는 이미 손설거지를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오늘 저녁.

쌓아둔 설거지거리들을 처분하기 위해 샤워 후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식세기에 넣을까, 내 손으로 직접 설거지를 할까 고민한다.


그릇의 양이 식세기를 채울 만 한가, 쌓여있는 그릇 중에서 손설거지를 반드시 해야 하는 식기(예: 나무, 예민한 소재 등)가 너무 많지는 않은가 등등.. 여러 기준을 통과하여 식기세척기를 이용해도 좋다는 결론이 나기까지의 과정은 성가신 고민이다. 생각은 늘 에너지를 소모하니까.


오늘은 그릇의 개수는 보통 이상으로 많으나 기름기의 양은 보통이며 손설거지를 필요로 하는 예민한 식기의 양이 현저히 적다. 식기세척기를 돌려도 되는 조건인데,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내 머리에 사는 ‘뜬금이’라는 녀석이 뜬금없이 등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냥 후딱 해버리지 뭐,’


늘 뜬금이의 판단은 믿을 게 못 된다. 논리도 계산도 없다. 본능적으로 불쑥 내 행동을 이끈다. 그냥 후딱 해버리면 된다는 생각은 결국 내가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묻혀 거품을 내고 식기를 두어 개 닦은 뒤 어김없이 후회로 이어졌다. 후딱 설거지가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냥 돌릴 걸,”


중얼거려 봤자 소용이 없다. 이미 손설거지를 시작한 마당에 중간에 식기세척기를 돌리는 일은 굴욕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식기세척기가 소모할 전기와 물이 이제까지 손설거지를 감행한 내가 쓴 에너지와 더해져 극심한 낭비로 이어진다. 일단 손설거지를 시작했으니 식기세척기가 소모할 에너지는 아끼자는 계산인데 곧장 일이 터진 것이다. 공기그릇 하나가 산산조각 났다. (이케아에서 천 원에 산 저렴한 식기라 글 쓸 생각을 했지, 덴비 공기라도 됐으면 짜증에 절어 거실에서 FIFA게임에 한창인 아들과 남편을 들들 볶았을지도 모른다.)


와,

식기세척기 돌렸으면 공기그릇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와 깨지는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공기그릇의 파편과 아직 손설거지를 마치지 않은 식기들이 한데 뒤엉켜 내 머릿속까지 심란해졌다.


‘침착해야 해..’


침착해야 한다. 이 순간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침착함 뿐이다. 나는 마음을 다해, 침착하게 파편들을 덜어내고 남은 설거지를 이어갔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하나씩 손에 쥐고 거품 소멸 직전인 수세미로 정성 들여 닦았다. 가위도 벌려 문지르고,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젓가락과 티스푼도 천천히 분리해 닦았다. 위아래가 바뀐 젓가락도 가지런히 쥐어 닦고, 거품이 더 필요해지자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더 묻혀 거품을 냈다.

확실히 평소보다 오래 걸린 설거지였다.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설거지를 위한 일련의 과정을 새이버링 했다. 대개 새이버링은 내 행복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나는 지금 설거지를 하고 있고, 식기세척기를 돌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지만 이제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남은 설거지를 꾸역꾸역 하고 있다. 특히 손설거지가 성가신 젓가락, 숟가락, 가위 같은 식기를 수세미로 닦을 때 후회가 증폭된다. 어째서 식기세척기를 안 돌리고 이런 후회를 하며 꾸역꾸역 설거지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오늘의 이 후회를 글로라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뜬금이는 제 잘못에 대한 미안함도 없이 설거지를 마무리 한 나에게 이 글을 쓰라고 시킨다. 지금 최대한 자세하게 내가 절절하게 했던 후회를 남겨야 한다고. 그래야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뜬금이가 시키는 대로 뜬금없이 후회를 기록한다.


”앞으로는 웬만해서는 식기세척기를 돌릴 거야!“


이 다짐을 125번째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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