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이야기
“더러워, 만지지 마.”
Y는 자기 필통 속 하이텍 펜에 관심을 보이는 내 손을 파리 몰듯 밀어냈다. 앞자리에 앉은 나는 졸지에 전염병 환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말로 공격을 받았을 때 방어하는 기술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도록 배운 적이 없다. 당황한 눈으로 Y를 빤히 바라 보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비웃음이었을까. 누군가를 함부로 무시하고 난 뒤에, 나를 깔아뭉개고 난 뒤에 승리감을 느꼈을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멋쩍어 입술만 씰룩거리다 몸을 돌려 앉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시야 밖으로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그림자가 느껴졌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내 무릎 옆으로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그걸 줍고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에 앉은 여자애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주웠어야 할 쪽지를 내가 주워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펼쳐 본 종이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누르고 생각했다. 왜 아이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내 필통에는 한 자루에 천 오백 원이나 하는 하이텍 볼펜도 색깔별로 없었고, 발표를 하면 얼굴이 빨개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개미소리같이 작은, 비음 섞인 코맹맹이 목소리 때문일까. 그 시절 나에게는 그들에게 있던 무엇이 없었던 걸까?
"엄마, 아까 그거 다시 봐볼래."
"이제 그만 보면 좋겠는데?"
"아니, 한 번만..."
손톱보다 작은 프라이팬으로 요리하는 미니어처 신공, 수천 개의 도미노가 삽시간에 쓰러지는 장면, 젤리와 초콜릿, 물감을 슬라임에 섞는 기괴한 장면 등 인스타그램 릴스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빠른 시간 눈길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아이는 가끔 칭찬받을만한 일을 했을 때 '그 영(그림영상)' 5분을 보상으로 요구한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는 '밥 로스'아저씨의 영상으로 시작했지만 손가락을 밀어내리다 보면 그림뿐만 아니라 눈이 번쩍 떠지는 신박한 영상이 노출되곤 했다.
"그럼 이다음 영상까지만 보는 거다, 약속!"
"웅 알겠어, 약속!"
아이가 다음 영상을 보기 위해 손가락을 밀고 또 밀었다. 관심을 사로잡는 영상이 나올 때까지 가차 없이 밀었다. 옆에서 뭘 보는지 지켜보는 내가 다 어지러웠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
"아이, 엄마 왜? 이런 건 재미없어."
"아까 그 영상으로 다시 올려봐!'
한 개만 더 보기로 약속한 아이는 안달이 났지만, 빛의 속도로 지나친 영상 속 낯익은 얼굴을 본능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다시 반대로 밀어내려 방금 본 영상 속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확인했다. 사교육 전문가 행세를 하며 엄마들을 가르치는 거만한 목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나를 괴롭힌 그 아이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