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딸기
희고 붉은 것이 한데 휘섞여 만들어 낸 그라데이션이 시선을 강탈한다. 해마다 4월이면 모두의 입맛을 돋우는 딸기라떼는 저지방 우유나 멸균우유보다는 차고 희며 크림처럼 진한 우유로 만들어야 더 맛있다. 붉디붉은 딸기청은 숙성이 잘 돼 꾸덕하고 과육이 씹혀야 제 맛이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집에 가는 길, 싱싱한 딸기를 사러 농산물 공판장에 들렀다. 여기저기서 하얀 스티로폼 상자에 담긴 딸기들이 새콤한 향기를 풍긴다. 어차피 설탕에 담글 녀석들이니 먹음직스럽게 굵고 달지 않아도 싱싱하기만 하면 괜찮다. 딸기청을 만들 거라 말하며 주인에게 딸기 두 상자를 만 원에 흥정했다. 테이프로 만들어 준 손잡이를 야무지게 들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들통에 와르르 부었다. 찬물을 틀고 식초 두어 방울을 떨어트려 잠시 담가 뒀다가 흐르는 물로 세척한다. 꼭지를 벗기는 척 벌려 물줄기로 개운하게 샤워시킨 딸기를 채반에 탈탈 밭쳐 물기를 적당히 뺀다. 과육을 최대한 남겨 딸기 꼭지를 따고, 빠른 손놀림으로 절반 또는 서너 등분 한 딸기 조각들을 큰 보울 안으로 모은다. 산처럼 쌓인 딸기 조각들을 누름틀로 으깨거나, 그도 안 되겠으면 장갑 낀 손으로 주물럭주물럭한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미꾸라지 같은 과육이 귀엽고 앙증맞아 자꾸 붙잡아 으깨며 미소가 번진다.
생딸기향이 온 집에 퍼지면 입에 침이 고이는 걸 참을 수 없어 국자를 꺼내 묽은 딸기국물을 추려 유리잔에 담는다. 잘 녹고 몸에도 덜 나쁜 자일로스 설탕 한 스푼을 휘리릭 섞어 후루룩 마신다.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기도 한 게, 어째 이렇게 애교스럽고 사랑스러운지, 입속에 들어와 살아남은 과육은 혀로 부드럽게 으깨어 삼키고, 어쩌다 이에 걸리는 딸기씨도 오도독 씹어 먹는다.
커다란 보울에 으깨진 딸기 위로 눈처럼 하얀 설탕을 후루룩 붓는다. 정확한 계량 따위는 필요 없다. 눈짐작이면 충분하고, 아쉬우면 간도 본다. 사실은 레시피대로 설탕을 넣기가 건강에게 미안해서 1:1의 계량비율은 늘 포기한다. 딸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설탕을 적게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국자로 한 스푼 떠서 맛을 볼 때 좀 많이 달다 싶으면 놔두고, 그냥 먹기에 적당하다 싶으면 설탕을 달래듯 조금씩 넣어 우유를 부었을 때 적당히 달도록 알맞게 맞춘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수납장에서 꺼낸 유리병을 가볍게 소독한다. 물기를 탈탈 털고 뜨거워 금세 마른 유리병 안에 딸기청을 국자로 조심스럽게 떠 담는다. 그러다 갑자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빠트린 게 생각나 손놀림을 멈춘다.
아차, 레몬즙을 잊었다!
끼고 있는 장갑을 벗기가 여간 성기신 일이 아니라 서둘러 남편을 불렀다.
"냉장고에서 레몬즙 좀 꺼내 부어 줘."
즐겨 먹는 하이볼 재료인 레몬즙이 사는 곳은 남편이 나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다. 밥 숟가락으로 서너 스푼 정도를 넣고 휘섞은 딸기청은 아까보다 윤기가 차르르 흘렀다.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우는 딸기청이었다. 유리병에 차곡차곡 담기는 딸기청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나도 참, 뭐든 조금씩만 만드는 법을 몰라.'
손이 워낙 빨라 딸기 두 박스로 병 4개를 채우는 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병에 담긴 녀석들은 내일까지 상온에서 숙성을 거쳐 냉장고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신선도를 위해 일주일 안에 해치워야 한다. 친정엄마에게 맛보라고 전해줄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병에 담고 애매하게 남은 적은 양의 딸기청은 숙성이고 뭐고 유리잔에 담아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우유에 섞는다. 얼음 두어 조각도 '딸가닥'소리를 내며 시원한 맛을 거든다. 굵직한 빨대를 꽂아 가볍게 저을 때 붉고 흰 것들이 만드는 그라데이션을 황홀하게 감상한다. 호로록 빨대를 타고 들어오는 과육을 씹어먹으며 말한다.
오늘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