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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묘비명은 ‘여한 없이 살다 감’입니다.

죽음을 떠올리면 더 잘 살고 싶어지는 아이러니

by 새이버링

2024년 12월 29일 무안에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가 났을 때 내 언니는 가장 친한 벗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언니가 느낄 상실감은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절친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 또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약한 인간이 아닌가.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고, 절친의 사소한 행동까지 회자하는 언니를 보며, 내가 세상을 떠나도 남겨진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회자할까 욕심이 났다.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더 잘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커진 것이다.


살면서 ‘죽음’이라는 생각의 문턱 앞에서 등을 돌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죽는다’는 말을 금기시했다. ‘말이 씨가 된다.’며 ‘만약에 누가 죽으면...’과 같은 표현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독서를 하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비롯한 많은 위인들이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모두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 죽음 앞에서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모든 고민과 갈등은 하찮아진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이 죽는다면 어떨까를 상상할 때 그 상상 안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그 상상이 끝났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에 대한 감사와 만족은 상상 전보다 커진다.


종종 퇴근길 순환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할 때가 있다. 저 사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그럴 때는 속도를 조금 늦추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리고 상상을 한다. 만약에 내가 오늘 교통사고가 났는데 죽기 직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제발 시간을 1분 전으로 되돌려 주세요.’라고. 즉시 이 끔찍한 상상에서 빠져나와 1분 전으로 되돌린 현재를 인식한다. 말도 안 돼. 나는 지금 살아있고 평화롭다. 포근한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니! 평범한 이 사실이 새삼 행복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는 머릿속을 장악하는 성난 고민들도 다 꼬리를 내린다. 나에게 함부로 했던 누군가, 나를 성가시게 했던 부탁, 내일 해야 할 무거운 숙제들... 따위는 중요치 않고 다만 나에게 주어진 삶을 겸허히 감사하며 살고 싶어진다. 내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를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진다.


'이곳에는 여한 없이 살다 간 사람이 잠들어 있습니다.'


내 묘비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면 어떨까. 죽은 뒤 남겨진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올 때 이 글을 보면 미소 짓지 않을까? 묘비명을 위와 같이 정한 건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 묘비명이 내 삶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 같아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뭐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은 답은 ‘남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이라는 내용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진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꼭 해봐야지 하는 다짐을 하면서 묘비명을 정했다. 묘비명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죽음의 목표다. 눈 감기 전에 나 스스로에게 ‘여한 없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앞으로 내가 내릴 선택을 검열할 것이다. 어떤 결정이 좋을지 고민스럽다면 묘비명만 떠올리면 된다.


'살아생전 여한 없이 살다 간 사람의 선택은 A인가, B인가?‘

이 질문이라면 어떤 고민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묘비명을 정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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