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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면 너와 함께할 시간의 93%는 써버린 것

지금 남은 시간은 얼마쯤일까.

by 새이버링

"내가 혼자 가볼게, 엄마."


하교 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통은 퇴근 후 내가 차로 학원까지 바래다주는데, 오늘은 학교에서 수학학원까지 걸어가 보겠다고 한다. 약 2.5km쯤 되는 거리가 녹록지 않을 텐데, 배도 고플 테고. 음 그리고... (안 될 이유는 없지만 해본 적 없는 일을 할 때는 늘 이렇게 소극적으로 안 될 이유를 찾는다.)


"같이 걸어가 본 적도 없는 길인데, 너 정말 혼자 갈 수 있겠니?"

"응, 나 지난번에 엄마 출장 갔을 때 지도 보고 걸어가 봤잖아. 엄청 빠른 걸음으로 20분 만에 갔는걸?"

"어... 진짜 괜찮겠어?"

"응. 나 여기 편의점에서 뭐 좀 사 먹다가 혼자 숙제하고 시간 맞춰 갈게."


바래다줄 수 있는데 혼자 가보겠다고 할 때, 엄마는 바래다주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힘들다. 고생할까 봐, 다리 아플까 봐, 늦으면 조바심이 나서 서둘러야 할까 봐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냈다.


"그래, 그럼 네가 한 번 해 봐."


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가. 열네 살이나 된 아들이 혼자 학원에 걸어가겠다는데, 그걸 허락하는데 용기씩이나 필요한 일인가. 기다렸다가 괜스레 불안해져서 잘 걸어가고 있을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예감은 놀랍도록 적중한다. 지름길인 숲길로 가는 중인데 길을 잃은 것 같단다. 가로등은 안 켜져 있냐고 물으니 어두워서 휴대폰 플래시를 켜야겠다고 한다. 휴대전화 위치추적 서비스를 켰는데 언덕 어디쯤에 서성이는 아들을 발견한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수화기에서 들리는 아들의 목소리.


"엄마, 나 길 찾은 것 같아. 근데 끊지 마. 무서우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면 자녀가 부모님과 대면할 시간의 93%를 써버린 것이다.
팀 페리스, <타이탄의 도구들> 중에서

중1인 아들이 낯선 길로 혼자 걸어가 보겠다고 했을 때, 함께 가본 적이 없는 길을, 해가 빨리 지기 시작해서 어두운 길을 혼자 가보겠다는 말에 기쁨과 걱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혹시 혼자 언덕을 오르다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어쩌나, 길을 헤매다가 시간에 쫓겨 횡단보도에서 위험한 순간을 만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머릿속에는 내가 겪었던, 혹은 겪을 뻔했던 아찔한 순간들이 모든 경우의 수로 등장했다.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후회로 이어질지도 몰라. 하... 데려다주고 올 걸 그랬나?


반면에,

혼자 걷다 보면 떠오르는 공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하고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궁금해하다가 새로운 길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 나 자신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성취감. '이건 우리 반에서 나만 해본 일이야!'와 같은 우월감.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길을 잃어본 사람만 아는 두려움이 개척에 따른 성취감을 극대화한다. 아이에게 자율을 허락하지 않으면 10대에 맛볼 행운을 놓치는 셈이 된다. 돈주고도 못 살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경험이 하나 추가될 것이다. 인간은 경험에 의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해본 경험이 많아지므로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다르다. 새롭게 해 보는 모든 일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먼 훗날 길을 잃을 뻔했던 오늘의 경험이 거대한 도전의 씨앗이었다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나는 열네 살의 너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넉넉잡아 전부의 30%쯤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63%는 너를 품에 끼고 살 때 다 써버렸을 것이다. 이 시간을 '숙제해라', '책 좀 봐라' 잔소리만 하다가 쓰고 싶지는 않다. 네가 혼자 도전해 보는 걸 격려하고 응원하는데 쓸 것이다. 실수하고 서툴러도 다음엔 더 잘해보자고 말하는데 쓸 것이다. 훗날 고작 남은 7%를 아껴 쓸 때, 30%가 더 남은 지금을 의미있게 쓰지 못한 걸 후회하며 살지는 않으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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