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연극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좋은 희곡은 별 장치가 필요 없다

by 소행성 쌔비Savvy

좋은 희곡으로 공연되는 연극을 보는 쾌감은 매우 크다. 좋은 희곡인 것을 어떻게 아냐고? 보다 보면 안다. 보면서 납득이 되고 절로 극에 몰입되며 빌런이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미국의 드라마 작가이며 극작가인 지나 기온프리도가 쓴 연극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가 그랬다. 120분 동안 온전히 극에 빠져 든다.


연극은 핼러윈 주말 저녁부터 새벽까지 그레이엄 엄마의 별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레이엄은 6개월 전 엄마가 죽은 후로 일도 하지 못한 채 엄마가 남긴 말도 안 되게 많은 문서(책이 되지 못했으므로 그저 문서다) 속에서 지낸다. 이런 그레이엄에게 매우 현실적이며 자기 계발서를 믿는 여자 친구 타냐는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이 집을 리모델링해 임대를 생계에 보태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날 밤 타냐가 일하는 바에서 소동이 일어난다. 미란다는 동석한 남자에게 살해 위협을 받고 이런 미란다를 타냐는 그레이엄 집으로 피신시킨다.


얼떨결에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된 그레이엄과 미란다. 어색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둘은 위스키를 마시고 미란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자신이 어쩌다 28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으며, 두 남자 사이에서 살해 위협을 받게 된 일에 대해. 엄마의 문서를 어쩌지 못하는 그레이엄도 슬슬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타냐가 오고 미란다의 슈가 파더 데이비드가 쳐들어 오며 혼란은 가중된다.


극은 성인이 되어도 자유롭지 못한 부모와의 관계, 부모의 영향을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사연을 듣자면 그 밑바닥엔 엄마 혹은 아빠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어떤 사건들이 존재한다. 미란다는 엄청난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 엄마의 지적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명문 사립대학을 다니고 박사가 되었지만 그게 그의 생계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레이엄은 혼자 죽어가는 엄마를 방치한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싱글맘 타냐는 자신의 아이에게 중산층의 삶과 교양을 주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갈아 넣을 준비 중이다. 최고의 성형외과의사인 데이비드는 철저한 성과주의 가정에서 자라며 감정조차 돈으로 계산하며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깨닫지 못한다.


극은 한마디로 하룻밤의 소동이다. 감정으로 휩싸인 사람과 생계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며 자기 계발서를 읽는 사람이 소통을 한다는 것은 태산을 오르는 것만큼 어렵다. 그럼에도 우린 꾸역꾸역 오른다. 극 중 인물은 모두 결핍투성이다. 그 결핍은 사람을 웃기고 울린다. 쫀쫀한 대사와 그 대사를 적절하게 쏟아내는 배우들을 보면 감탄하게 된다. 특히 이지혜 배우의 연기는 압권이다. 마녀복장에 기괴한 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위스키를 한 잔 마실 때마다 그에 맞게 적당히 취한다. 그러나 자기 할 말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안쓰럽다. 전작 <집에 사는 몬스터>를 보고 이 극까지 본다면 내면의 상처가 깊은 사람을 표현해 내는 이지혜 배우만의 연기에 박수를 칠 것이다. 한없이 외로운 눈빛의 송철호 배우도 엉뚱하며 똑똑한 척하는 김승환, 서미영 배우도 모두 좋다. 연출은 이 배우들의 매력을 한껏 뽑아냈다. 속도감 있는 대사 적절한 효과도 좋다.


12일까지 나온 시어터에서 상연된다. 나는 한 번 더 볼까 살짝 고민 중이다. 현매도 가능하니 대사발 많은 연극 좋아하는 이들, 부모로부터 감정 독립이 어려운 분들, 누군가를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분들께 추천한다. 든, 120분간 불편한 의자는 참아야 한다. 웃음을 참을 필요는 없다. 이 극은 우리 인생처럼 슬픈 블랙코미디다.


지나 기온프리도 작

김희영 연출

프로덕션 IDA 제작

출연 이지혜 송철호 김승환 서미영 (카메오 윤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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