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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희곡이 그것을 제대로 읽어낸 연출을 만났을 때

연극 <언덕의 바리>

2024년의 첫 연극은 고연옥 작, 김정 연출의 <언덕의 바리>였다. ‘프로젝트 내친김에’와 신체 움직임을 중심으로 극을 표현하는 ‘극단 동’의 협력작품이다. 올해의 창작산실 첫 작품으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상연되었다. 개막 첫날 로비엔 연극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보였다. 그들은 다소 들떠 보였다. 고연옥 작가와 김정 연출 콤비의 신작에 대한 기대였으리라.


극장에 들어서면 대극장 좌석은 갈대 언덕이 되어 관객을 맞이한다.  반짝거리는 까만 바닥의 텅 빈 무대는 쓸쓸함과 신비함을 주며 ‘야~~ 무대 멋지다’란 탄성이 나온다. 왜 언덕인가? 에 대한 생각이 이 연극에 다가서는 키 포인트이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언덕, 심지어 그 언덕에서는 쓸모도 없는 배라니! 상징과 은유를 무대 디자인으로 구현해 버렸다. 바리는 바리데기에서 차용했다. 바리데기는 버려진 아이라는 뜻을 갖는다.


암전과 함께 전 출연진이 무대에 오르고 배우들은 부드럽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움직인다. 그 가운데 경신 역의 주인공 김문희 배우가 젊고 꽃다운 동작과 목소리부터 노인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데 관객은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클래식과 오래전 유행가가 망라된 음악도 무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독립운동가 명단에 존재조차 없었던 안경신, 그는 만삭의 몸으로 폭탄을 몸에 감고 평양 경찰서에 돌진했다고 한다. 이 연극은 여성 독립 운동가 안경신의 선택과 결단을 다룬다. 그리고 극복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저마다의 선택과 변명은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극대화되어 보인다. 반복되는 상황은 외투 돌려 입기,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는 마음은 올라타 붙기로, 전투는 춤으로 그래서 극은 더 처연하다.


김정 연출은 다양한 신체 표현과 대사 진행 방식으로 고연옥 작가의 시대극을 한 편의 그리스 비극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재영 안무가와의 협업으로 만들어 낸 배우들의 움직임은 한 명의 배우가 대여섯 명 이상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이 있다. 그러니 배우가 홀로 서도 너른 무대가 꽉 차 보인다.


연극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움직임과 노래하듯, 때론 시를 낭송하듯 하는 대사 처리. 김정 연출은 자신만의 연출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 같다. 멋있다. 그러나 배우들은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을 몸치로 밝힌 류혜린 배우가 얼마나 힘겹게 연습하는지를 피드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노력이 무대에 잘 나타났다.


고연옥 작가의 작품 중엔 <칼 집 속의 아버지>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연극을 보고 나오며 너무 좋은 희곡을 아무렇게나 무대에 올렸다고 화를 냈었다. 역시 좋은 희곡은 그 희곡을 제대로 읽어내는 연출을 만나야 하고 그러면 얼마든지 빛을 더 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옛날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이 어떻게 무대에서 표현되었을까 상상하고 싶다면 꼭 보시라! 나도 두 번 보고 싶지만 상연 기간 전석 매진이다. 단, 연극에 익숙하지 않거나 드라마 중심의 극을 좋아하은 사람에게 이 극은 다소 지루하고 이해 못 할 극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좋은 작품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참 고맙다.


고연옥 작

김정 연출

프로젝트 내친김에 X 극단 동 제작

출연 김문희, 김정아, 최태용, 강세웅, 이래경, 이은미, 송주희, 류혜린, 이재호, 임주현

무대 남경식, 작곡 채석진, 안무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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