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 연출, 윤성원 배우 1인극 <붉은 웃음>
2024년 11월 21일. 유품정리사가 한 집에 들어와 고인이 남긴 짐을 정리한다. 그 속에서 고인이 남긴 메모를 읽는다. 죽은 이는 청년이었고 지독하게 쓸쓸했다. 고독사다. 1904년 전쟁으로 두 다리를 잃은 형이 돌아온다. 형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두 달 동안 글을 쓰다 죽은 형이 남긴 원고엔 글이 없다. 동생은 형의 죽음이 궁금하다.
연극은 20세기 초 러시아 작가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소설 <붉은 웃음>을 원작으로 여기에 김정 연출의 의도에 따라 2024년 청년의 고독사가 합해지며 하수민 작가가 재창작했다. 120년 전 청년은 이유 모를 전쟁에서 죽어갔고 현재 청년은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출연 배우는 윤성원 1인이다. 국립극단 시즌 단원이었던 그는 <이 불안한 집>으로 김정 연출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극 중에서 유품정리사, 동생, 형 등 모든 출연진을 혼자 맡았다. 여러 인물을 표현하지만 보통의 1인극처럼 정신없지 않다. 내레이션의 적절한 활용으로 장면 전환은 물론 관객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작품을 위해 지난 8월부터 몸을 만들기 시작한 윤성원 배우는 개막일에 체지방률을 9프로 대로 떨어트리고 작품의 문을 열었다. 원래도 몸을 잘 사용하는 배우인데 고통과 고독을 표현하며 동시에 아름다운 몸으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해주는데 우리 몸은 감정 표현 기관이란 것을 확실히 해줬다. 게다가 내레이션 목소리는 마냥 따듯하고 아름답다.
전쟁과 죽음 청년의 고독사 혹은 자살을 한 무대에서 이야기한다. 슬프다. 당연하다. 그러나 마냥 슬픔에 빠트리진 않는다. 작품은 우리에게 제자리에 앉아 몸 만이라도 살라고 말한다. 영혼을 살리진 못해도 더 이상 죽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1인극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몹시 지치고 힘든 극 형태다. 끊임없이 역할을 바꿔가며 혼자 연기 배틀하듯 분주히 무대를 활보하는 배우를 보다 보면 관객도 숨이 차다. <붉은 웃음>은 이런 면에서 관객을 몰아치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타이밍에 생각할 틈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말하려는 바가 더 깊게 파고 들어왔다. 역시 영리한 연출과 연기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전쟁의 죽음과 현대의 고독사를 등가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120년 전은 눈에 보이는 전쟁터에서 지금은 나를 둘러싼 여러 조건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살아남아야 한다.
김정 연출과 윤성원 배우는 우리에게 죽지 말라고, 살아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귀하다고 그러니 뛰어내리지 말라고 온 마음과 몸으로 외친다.
<붉은 웃음>은 볼 땐 무섭고 슬퍼 소름 끼치고, 보고 난 직후엔 슬픔에 가슴이 먹먹하고, 하룻밤을 자고 다시 생각하니 용기가 생기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묘한 울림을 주었다.
12월 1일까지 더줌아트센터에서 상연된다.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더 보았으면 한다. 1인극이라는 장르의 완성도도 고전과 현대의 어울림도 좋다. 다소 어둡고 죽음을 정면으로 이야기해 불편할 수 있지만 마주해야 더 단단해질 수 있다.
김정 연출은 작품을 준비하며 김완 작가의 <죽은 자를 위한 집청소>를 읽고 참고했다고 한다. 김완 작가님도 꼭 보셨으면 한다. 작가님의 글로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게 되는지 확인하실 수 있다.
원작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번역 이수경
원작/재창작 하수민 @moromuscle
구성 김정 윤성원 이동인 Eon Kim
연출 김정 @shinji8406
출연 윤성원 @onefume
조연출 무대감독 이동인
무대디자인 남경식 @kyoungsik_nam
조명디자인 신동선
주관 프로젝트내친김에 @projectwhile
@the_zoom_arts_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