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웅 신작
내게 연극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선웅 연출의 오랜만의 신작 <유령>을 보며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시체안치실과 묘비가 세워진 무덤으로 보이는 무대에 이지하 배우가 나와 자신을 배명순 정순임 다시 배명순이라고 설명한다. 극 중 극인가? 이머시브일까? 궁금하던 차에 배명순의 남편 오 씨가 나와 배명순을 두들겨 팬다. 폭력을 견딜 수 없던 명순은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며 근근이 살다 남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정순임이 된다. 10년 간 정순임으로 살다 온몸에 암이 퍼졌다. 치료를 위해선 신분 복원이 필요했다.
영화 <화차>에서 김민희가 맡았던 차경선은 살인을 통해 완벽하게 타인으로 산다. 실제 자신을 소멸시킨 채 말이다. 배명순은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를 죽이든가 자신이 사라져야 했다. 이런 일은 왕왕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일 말이다. 이럴 때 유일한 방법은 있지만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유령은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무연고자로 시체 안치실에 버려진 삶을 들여다보면 이 안엔 이런 삶이 수두룩한 것이다. 극 중 배우들은 극 중 인물이 되기도 하고 자연인인 자신이 되기도 한다. 일종의 극 중 극 형태다. 그러다 결국 지금 자신이 연기하는 게 극 중 역인지 실제 자신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
고선웅 연출의 전작 <회란기>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와 달리 유령은 현재의 이야기를 한다. 무대 장치는 단순해 보이나 배우들의 더미까지 등장하는 대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귀에 익은 대중음악이 툭툭 나와서 웃음이 새어 나오게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처음 배 씨가 오씨에게 맞는 장면에선 영화 <러브스토리> 주제곡 눈싸움이, 오 씨가 배 씨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장면에선 레오날드 코헨의 I’m your man 이 나온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배치인가! 매우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에 엉뚱한 음악이 얹어지며 긴장이 살짝 풀린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무대감독이 등장하여 상황이 묘하게 복잡해진다.
아무튼, 여러 면에서 재미있고 의미 있고 슬프고 무서운 연극이었다. 서울시극단 강신구, 김신기, 이승우 배우는 물론 베테랑 신현종 배우와 십 년 만에 무대에 오른다는 이지하 배우의 다채로운 연기가 참 좋다. 조씨고아에 출연했던 전유경, 회란기에 출연했던 홍의준은 역시 고선웅표 작품에 잘 맞았다. 아직 회차가 남았으니 보시길!
고선웅 작 연출
이지하 신현종 홍의준
강신구 김신기 이승우
전유경 홍의준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