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사를 통해 본 내선일체의 허무맹랑함

연극 <튤립>

by 소행성 쌔비Savvy


연극 〈튤립〉은 식민지 시기의 거대한 역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한 집안의 조용한 거실 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역사 속에서 뒤틀린 개인의 삶을 서서히 드러낸다. 작품은 일본 도쿄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자라난 조선인 청년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내선일체’라는 동화 정책이 남긴 균열을 탐색한다.


극은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는 사건 중심의 드라마라기보다,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을 통해 서사를 구축한다. 조선인 남자 쿠로(검다)와 일본 가정에서 자라난 청년 쥬리프(튤립), 그리고 그를 길러온 일본인 부부 사이의 관계는 보호와 소유, 죄책감과 책임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으로 얽혀 있다. 이들의 대화는 겉으로는 차분하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이 만든 정체성의 균열이 자리한다. 작품이 ‘내선일체’를 다루는 방식도 이 지점에서 의미를 얻는다. 그것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이름과 기억, 그리고 삶의 방향까지 바꾸려 했던 동화의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에리코가 쿠로의 등을 한 다발의 생화를 때리고 화사한 꽃잎들이 검은 무대에 퍼질 때 이들이 가지렸던 내선일체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바람인지 알 수 있다(이 장면은 몹시 폭력적인데 아이러니하게 너무 아름다워 깜짝 놀랐다).


전인철 연출은 이러한 서사를 과장된 장치 없이 담아낸다. 무대는 소파와 의자, 피아노, 벽난로 정도의 최소한의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면 전환 역시 단순한 움직임으로 해결된다. 검은 직육면체 박스를 한 면만 잘라 그대로 무대로 사용한 듯한데 이 무대의 상징성이 크다. 음향 또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조명이 인물들의 실루엣과 그림자를 또렷하게 드러내며 무대에 조용한 긴장을 만든다. 화려한 시각적 효과 대신 배우들의 움직임과 침묵이 극의 흐름을 이끌도록 한 선택이다. 덕분에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표정과 말의 간격,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집중된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러한 연출과 긴밀하게 호흡한다. 쿠로 역의 권정훈 배우는 첫 장면부터 엄청난 양의 독백을 하며 관객을 집중시킨다. 쥬리프 역의 배우는 일본식 이름으로 살아온 청년의 불안과 혼란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일본인 부부를 연기한 배우들은 보호와 책임 사이에서 흔들리는 복잡한 감정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하며 극의 균형을 잡는다. 이들의 연기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기보다 정지된 긴장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튤립〉은 격렬한 갈등이나 극적인 반전을 앞세우는 작품이 아니다. 대신 조용한 대화와 침묵 속에서 식민지 시대의 상처와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천천히 드러낸다. 화려함 대신 절제, 설명 대신 여백을 선택한 이 연극은 관객에게 역사 속 개인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꽃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아래 숨겨진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상징성이 큰 만큼 여운이 긴 작품이었다. 그래서 관극 후 희곡을 샀다


김도영 작 전인철 연출

권정훈 김하람 김정호 황순미 윤경 출연

극단 돌파구 작품 @dolpagu2015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arkoselection


#연극리뷰 #창작산실올해의신작

매거진의 이전글고선웅 연출표 맥베스 연극 <칼로 막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