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웃으면 관객이 운다

고선웅이 셰익스피어를 비트는 방식 — 연극 〈리어왕 외전〉

by 소행성 쌔비Savvy

하늘극장 원형 무대에 불이 켜지기 직전, 잠깐 생각했다. 리어왕은 안다. 늙은 왕이 딸들에게 배신당하고 광야에서 무너져가는 이야기. 수백 년을 살아남은 비극의 교본 같은 것. 그런데 '외전'이라니. 게다가 고선웅이. 그가 셰익스피어에 손을 댄다는 건,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예상은 맞았고, 또 완전히 틀렸다.


이영석이 연기하는 리어왕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 등장 자체가 과하다. 왕관이 조금 비뚤어진 채로, 대사 속도는 한 템포 빠르게, 몸짓은 한 박자 더 크다. 처음엔 이게 희극인지 비극인지 감이 안 잡힌다. 웃어야 할 것 같은 장면에서 뭔가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비장해야 할 순간에 객석 어딘가에서 피식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그 어긋남 속에서 무언가 진짜가 보인다.


고선웅은 원작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서사를 변형하고 오락성을 더했다. 의상은 동양풍으로 바꾸고, 대사는 우리 귀에 걸리지 않도록 현지화했다. 영국의 왕과 공작들이 어느 틈엔가 이쪽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건 그 때문이다.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온다.


국립극장 하늘극장의 원형 무대는 이 연극에 꽤 잘 맞는다. 관객이 사방에서 배우를 둘러싸는 구조라,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배우의 눈빛이 직접 날아오고,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거리. 그 친밀함이 역설적으로 이 이야기의 잔인함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리어가 딸들에게 배신당하는 장면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조금 무거워졌다.


글로스터 역의 유병훈은 극 중반 이후 무대의 중심을 조용히 가져간다. 리어의 충신으로서 그를 따르는 인물이지만, 유병훈의 눈에는 처음부터 이미 모든 걸 예감하는 사람의 무게가 실려 있다. 리어가 소리 높여 울부짖을 때 그는 말 대신 몸으로 답한다. 그 대비가 관객의 가슴에 조용히 꽂힌다. 요란하지 않은데 오래 남는 종류의 연기였다.

고선웅은 '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말을 즐겨 쓴다고 한다. 슬프되 슬픔에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뜻. 감정을 정면으로 들이밀면 관객은 오히려 방어막을 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연극은 슬픔을 약간 비틀어 보여준다. 과장된 신파 연기처럼 보이는 몸짓, 리드미컬하게 내뱉는 대사들 — 그게 가식처럼 느껴지는 찰나, 그 가식이 정확히 인간의 어리석음을 찌르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웃다가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는 분명히 웃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졌는지 잘 모르겠다.


조영규, 강지원, 양서빈, 조한나, 이지현, 견민성. 극공작소 마방진의 배우들은 이 스타일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다. 군무처럼 맞아들어가는 장면 전환, 전원이 함께 쌓아올리는 리듬감은 20주년을 맞은 극단이 쌓아온 시간의 증거처럼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그 호흡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리어왕 외전〉은 4월 12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된다. 셰익스피어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고선웅이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공연 기간: 2026년 3월 20일 ~ 4월 12일 / 공연 장소: 국립극장 하늘극장 / 연출·각색: 고선웅 / 출연: 이영석, 유병훈, 조영규, 강지원, 양서빈, 조한나, 이지현, 견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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