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 | 『스토너』 | 알에이치코리아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컬럼비아 미주리 대학에 평생을 바친 윌리엄 스토너.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순간이다. 표면적으로는 동료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삶이었다. 그러니까 『스토너』는 (당시) 한 집 건너 한 집에 있을 법한 남자의 이야기다.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자신의 땅과 업을 대물림하기 위해 윌리엄을 농과대학에 보낸다. 하지만 그가 대학에서 몰두한 것은 농학이 아니라 영문학이다. 전공을 바꾸고, 고향을 등진 그는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아처 슬론 교수의 조언에 따라 교편을 잡는다. 친구였던 데이비드와 고든은 혈기를 앞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윌리엄은 학교에 남았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사지 멀쩡한 20대 남성이라면 스스로도 모욕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인공 윌리엄에겐 하나의 극을 이끌어 갈만한 주인공으로서의 면모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 무심하게 참전을 비껴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떤 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선택을 되도록 피하는 성격이다. 오히려 그의 주변인들이 주인공 캐릭터에 제격이다.
예를 들어, 참전용사로 돌아온 고든은 학장이 되겠다는 야망이 있고, 로맥스 교수는 스스로 신체적 장애와 사투를 벌이는 시니컬한 인물이다. 아내 이디스는 온갖 히스테리로 무장하고 이 세상 처절함을 자기 몫으로 만드는 주인공에 어울릴 법 하다. 게다가 그들은 윌리엄보다 대사의 지분도 많다. 윌리엄은 늘 듣고, 관조하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그의 성격과 선택이 느닷없는 열정을 만나는 순간, 윌리엄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하나뿐인 딸, 그레이스를 사랑했다. 아내가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그레이스를 헌신으로 돌보며 행복을 느꼈다. 결국 아내에게 딸을 내어주고 딸의 불행을 지켜봐야 했지만 말이다.
그는 문학을 사랑했다. 문학 앞에서 늘 진지했으며, 완고했다. 문학을 홀대하는 학생은 어떤 백그라운드를 위시해도 윌리엄에게 학위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신념에 따라 동료의 총애를 받던 학생을 낙제시켰다. 비록 그것 때문에 자신의 출세 길은 막히고 말았지만 말이다.
또, 불꽃처럼 사랑한 여성도 있었다. 내내 소극적이고, 무력했던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그래서 정말 기뻤다!) 겨우 1년 남짓, 그 사랑의 종착에서 안도하는 그의 모습은 물론 비굴과 비애로 가득했지만 말이다. 모순되지만, 그렇게 아무리 비극을 맞이해도 그의 열정은 그를 지탱했다. 그것이 열정인 줄도 모르고.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P.353)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며 전율한 부분이다. 1965년에 출간된, 평범하다 못해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 모를 윌리엄 스토너의 삶이 50여 년을 잠잠하다가 최근에야 주목받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는 삶 자체의 특별함을 일깨워주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위인전과 고전이 즐비한 책장 맨 앞에 꽂아놓고 싶다. 특별하지 않은 것, 그것이 인생이고, 인생, 그것은 특별한 것이라고. 언젠가 나의 아이들과 이 책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