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 찬양』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문학동네
나는 요즘도 가끔 잠을 설친다. 자신의 소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전에 겪은 수모 때문이다. 처음부터 화장실에 정착했더라면...이라는 고민을 세상 어떤 변기가 해봤을까? 내 삶이 뒤죽박죽이 된 것은 모두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자 탓이다. 그러니까 왜 변기를 전시실에 갖다놓느냐고! 그 변태 같은 예술가 때문에 나는 평생 정체성을 찾느라 애먹고 있다.
전시실에서 쫓겨나 이집 저집 전전하던 시절, 나를 발견한 이들은 대부분이 내가 진품이냐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주인의 결심에 따라 나는 거실이나 복도에서 시선을 받기도, 화장실에서 소변을 받기도 했다. 어떤 변기는 내가 호사를 누렸다고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작품과 변기를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은 자랑도, 추천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리고베르토 씨의 집에서는 달랐다. 그는 나를 욕실에 넣었는데 변기로 사용하진 않았다. 여기서도 눈요기이긴 했지만 내게도 즐거운 눈요깃거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의 주인 리고베르토 씨의 세정식이다.
그는 요일 별로 몸의 각 부위를 씻는 의식을 거행한다. 화요일은 발의 날, 수요일은 귀의 날과 같은 식이다. 그간 수많은 인간들을 봤지만 그처럼 씻기에 철저한 사람은 없었다. 세정식은 매주 같은 작업을 반복하지만 매번 놀라움을 선사했다.
예를 들어 발 세정식은 이렇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가 부기를 가라앉히고, 꼼꼼하게 각질을 제거 한 뒤 , 가위와 줄로 발톱을 정돈한다. 마지막으로 모아둔 각질과 발톱은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린다. (장식품인 변기가 바라보기에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다.) 또한 티눈과 굳은살은 적당한 때 뿌리 뽑아 자신의 발에 기생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세정식을 치르는 단호하고 엄격한 그의 태도에서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강한 에고가 느껴졌다.
그랬던 그가 요즘 들어 세정식을 간소화하고 있다. 욕실에 머무는 시간이 짧을수록 그는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정확히 재혼한 아내, 루크레시아 부인과 헤어진 뒤부터다.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주인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의 주인이 아내를 쫓아내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금슬은 온 세상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기 때문이다. 친엄마를 하늘로 보낸 아들 알폰소도 새엄마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알폰소가 아버지께 들이민 작문 과제, <새엄마 찬양>이 문제였다. 리고베르토 씨는 흐뭇하게 작문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루크레시아 부인과 알폰소가 육체적 관계를 가졌다고? 내가 뭘 들은 거지? 맙소사! 알폰소는 그게 사실이라고 의기양양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리고베르토 씨는 오죽했을까? 소리 없이 아들의 작문을 마저 읽던 그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이제껏 본적 없는, 두려움과 분노라는 감정이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구겨 넣은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알폰소는 지나치게 밝다. 새엄마가 떠났고 아버지는 슬픈데 수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아이를 보면 마치 이 집의 실질적 주인이 그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폰소의 어리광이나 투정, 혹은 애원 등이 아버지와 새엄마, 하인들까지 집안의 모든 어른을 제 뜻대로 주무르는 무기 같다는 느낌이 이제 확신으로 변하는 중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리고베르토 씨의 세정식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음에 낙담하고 있다. 그가 똥을 싸면서 쾌감을 느끼는 모습 또한 매일 봐도 지겹지 않았는데. 과연 언제쯤 예전의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주) 소설에서 명작을 인용한 것을 패러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