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반비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하다.
본인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그러하다.
산모와 태아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이. 아이가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오고 탯줄이 끊어지면 엄마와 아이는 개체로 분리된다. 세상 무엇보다 멀리. 하지만 ‘연결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특별함보다 우위를 점한다. 77억 분의 일이라는 확률로 봐도.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이야기는 첫 단어를 쓴다. 삶은 이야기의 연속이다.
어머니 집 마당에서 따온 살구에서 『멀고도 가까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살구가 1리터 정도 남았을 무렵 이야기는 끝난다. 살구에서 시작해 다시 살구로 돌아오는 이 책의 첫 문장은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다. 글이 반환점을 도는 8장에서 다시 한 번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로 말문을 연다. 독자들은 작가의 물음에 아이러니하게도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실제론 읽기)로 답한다.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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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는 어머니를 대변한다. 리베카 솔릿이 잣는 이야기의 자궁은 어머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어머니로 인한 트라우마다. 어머니는 딸의 금발을, 글쓰기 실력을 질투했다. 과연 지구상의 얼마나 많은 어머니가 그럴까만은 작가의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리베카 모녀의 이야기(물론 작가의 시점이지만)는 안타까우면서도 흥미로웠다. 흡입력의 실체는 단연 작가의 문체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듯한 담담함에서 그녀가 어머니를, 트라우마를 ‘이야기‘로 잘 극복해냈다는 확신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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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는 딸의 지독히 개인적인 이야기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를 분리한 듯, 분리하지 못한 그 지점에 진짜 타인의 이야기를 엮어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백조왕자, 눈의 여왕 등 흔히 알려진 것들부터, 체 게바라, 싯다르타 등 역사 속 인물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우다오쯔나 강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었다는 아타구타룩 이야기, 작가의 친구인 넬리(의 아이)와 앤의 이야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에게, 또 독자에게 멀고도 가까운 그 이야기들이 가족과 죽음, 감정이입과 연대, 명분과 편견을 모두 연결한 거대한 패턴으로 직조된다.
이야기는 이동한다. 의미도 이동하고, 모든 것은 변신한다. (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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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마지막 13장에서 되새긴다. 살구는 이야기를 하라는 일종의 권유였다고. 이어서 누군가의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인생을 뒤바뀐 사례를 소개한다. 종착에는 이제 당신도 이야기를 해보라는 작가의 권유가 담겨 있다.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제야 내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답해본다. 물음표 뒤에 “이야기란, 말하는 행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라 했던 이야기의 정의 위에서 내 이야기를, 내 이야기의 ‘살구‘를 찾아본다. 멀고도 가까운, 무겁고도 가벼운, 중요하고도 사소한 ‘이야기‘의 태동이 느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