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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Sep 28. 2020

과학과 예술이 마주 보는 곳, 뉴턴의 아틀리에

『뉴턴의 아틀리에』 | 김상욱 유지원 | 민음사


이 책을 함께 쓴 물리학자와 타이포크래퍼는 
두 영역 중 어느 쪽에도 가치의 우위를 두지 않으면서 
‘뉴턴의 아틀리에적 순간들’을 만나는 화창한 기쁨을 누렸다.  


중학교 1학년 국어시간. 수업 시작 전 선생님은 말없이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싱싱한 사과와 반쯤 썩은 사과였다. 반 친구들에게 어떤 것을 먼저 먹을지 손을 들어보라 했는데 거의 반반으로 나뉘었다. 간단한 심리테스트 중 하나였던 이 문제의 가이드는 이랬다. 썩은 사과를 먼저 먹겠다면 안정적인 성향일, 싱싱한 사과를 먼저 먹겠다면 대담한 성격일 가능이 높다는 것. 대담한 성격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행동파로 예술가적 기질이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싱싱한 사과를 먹겠다고 손을 든 친구 중에는 우리 반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영주가 있었다. 썩은 사과에 손을 들었던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이유를 합리화했다. 


“눈이 녹으면?” 이란 질문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이과를 나누는 간단한 테스트로 알려진 이 질문에 “물이 된다”는 답을 하면 이과, “봄이 온다”는 답을 하면 문과적 인간이라고 분류한다. 이러한 이분화는 ‘그래서‘ 문과와 이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식의 전개로 이어진다. 흔히 과학(이과)은 머리로, 예술(문과)은 가슴으로 하는 거라고 하는데 머리와 가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도 아니건만 과학과 예술 사이는 닿을 수 없을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애써 카테고리를 나누는 이유는 아예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으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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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학교를 비롯해 곳곳에서 융합, 통합이라는 말이 들려온 지 10년 정도 된 것 같다. 그 사이 ‘4차 산업혁명’이 등장했고 그 근간이라는 초연결, 초융합은 당분간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가장 중요한 테마로 지속될 것 같다. 그 가운데 근대화 과정에서 세분화된 사회의 면면을 이어 붙이는 시도가 만들어낸 흥미로운 시너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뉴턴의 아틀리에』는 그런 시류 안에 있는 책이다. 과학자 김상욱과 예술가 유지원이 각자의 시선으로 서로의 세계를 호기심 가득 건너다보고 있다. 스물여섯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물리학자와 타이포그래퍼의 글이 교차되는데 처음에는 소통, 유머, 죽음, 시 등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뒤로 가면서 평균, 스케일, 재료, 인공지능 등 과학적인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인상적인 주제 중 하나는 <시>다. 타이포크래퍼는 시인 이상의 「오감도 시제4호」를 과학자의 시선으로 뜯어본다. 1930년대 신문 인쇄 과정을 살펴보며 시인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혀를 내두르는데 나 역시 공감했다. 하지만 이 호기심 많은 예술가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뒤집어진 글자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 거울 속과 거울 밖의 나를 대입해 시인(혹은 인간)에 내재한 자아분열의 양상까지 분석해낸다. 


양자역학 전공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리는 시’라고 정의한다. 사물의 이치가 한 줄의 수식 혹은 한 마디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을 ‘우주의 시’라고 부른다면서 말이다. 글 곳곳에 김소연, 남진우, 윤동주 등의 시를 인용하는 시도가 꽤 주요했다. 시를 통해 우주를 바라보는 과학자는 묻는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라고. 


그런가하면 <점>이라는 주제를 풀어가는 두 사람의 접근 방식 역시 흥미롭다. 예술가는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 했던 칼 세이건의 말을 인용하면서 책 속의 점, 마침표로 우리를 이끈다. 그 점은 텍스트로 이어져 소설과 시 등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글을 마무리한다. 과학자는 쇠라의 점묘법에서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의 픽셀을 연결시키고 더 나아가 뉴턴의 운동방정식을 기술하는 미분을 등장시킨다. 우리가 점에 도달하는 무한히 0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보면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면서. 


이쯤 되면 ‘두 작가는 타고난 통합형 뇌구조를 가진 이들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문·이과 성향이 혼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창시절 음악은 좋아했지만 미술은 끔찍했고, 수학은 재밌었지만 물리는 지루했다. 공대에 진학했지만 교양으로 문학수업을 많이 들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문과생이었던 남편은 스티븐 호킹의 책을 즐겨 읽고, 법을 공부했던 친구는 과학 동화를 집필하기도 했다. 인간이 소우주로 비유되는 것으로 볼 때, 우리 안에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을 것이다. 다만 비율이 다를 뿐. 비슷한 맥락에서 한 인간이 가지는 성격이나 특성, 취향을 색조표로 본다면 그리드가 아니라 그라데이션으로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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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가득한 『뉴턴의 아틀리에』. 두 작가가 서로 마주 앉아 있다. 아니, 뉴턴과 고흐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는 것도 같다. 어느 날은 남편과 나도 그곳에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눈이 녹으면 물도 되고 봄도 된다고 찬찬히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과 이야기와 공간을 둘러싼, 태양을 떠난 지 약 8분 20초 정도 된 햇살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무지개를 만들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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