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 문예출판사 (1985)
여하튼 원자폭탄이 발명되어 기쁘다.
이번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그 폭탄의 꼭대기에 올라타고 갈 테다.
지원하겠다니까.
하느님께 멩세코 지원하겠다니까.
“오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야?”
초등학생인 막내 동생 피비가 고등학생 오빠 홀든에게 하는 말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열여섯 살의 홀든에게 세상은 혼탁함, 그 자체다. 위선 떨기 바쁜 어른들을 불신하고, 그런 어른들이 만들어낸 사회 관례에 대해 환멸을 서슴지 않는다. 친구들은 홀든의 이야기를 들어줄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고, 그나마 형 D.B.와 여동생 피비만이 위태로운 홀든(holden)을 꼭 붙잡고 있다.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어른 아이, 홀든 콜필드. 그 이름은 예민한 반항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명 사립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홀든이 3일간 거리 곳곳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 『호밀밭의 파수꾼』은 저자 샐린저의 자전적 소설이다. 1951년 발간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애정하는 작품이지만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한 탓에 당시엔 일부 학부모들이 이 책을 읽게 한 교사의 사임을 요구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콜필드식 어법 자체가 열여섯 살의 삶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반증이기도 한 탓에 많은 청소년들에게 동질감 혹은 대리만족을 주었고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20대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홀든이라는 <캐릭터>와 그가 벌이는 <반항 자체>에 집중했다.
4번째 퇴학, 이유는 낙제. 그것이 대단한 반항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품위 있는 결과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변호사 아버지는 홀든을 죽일 듯 혼내겠지만 이내 또 다른 학교를 알아봐줄 텐데. 만일 학창시절에 이런 친구가 주변에 있었다면 시쳇말로 재수 없다고 대 놓고 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 홀든에겐 연민이 느껴진다. 온갖 허풍과 치기로 똘똘 뭉친 시시껄렁한 반항아가 밉지 않았던 이유. 그 첫 번째는 홀든의 왜소하고 소심한 설정 덕분이 아니었을까. 만일 그가 덩치도 크고 겁도 없었다면 영혼까지 썩어버린 불량 청소년이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홀든은 천하의 쓰레기 캐릭터로 길이길이 남았겠지. 홀든을 미워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말투와는 상반된 꽤 인간적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리에서 만난 수녀에게 더 많이 헌금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스케이트 끈을 묶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는 모습 등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런 동정심 유발자 홀든이 거리를 전전하며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하는 어른 흉내를 내는 데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줄담배를 피우고, 술에 진탕 취해보기도 하고, 심지어 매춘부를 만나보기도 하지만 그 무엇도 방황에 대한 이렇다 할 명분도, 해답도 주지 못한다. 그때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도 매끄럽지 못하다. 룸메이트, 수녀, 매춘부, 상급생, 전 여자 친구 등등 모두 홀든을 혼자 남겨두거나, 그에게 등을 돌려버린다. (룸메이트와 포주에게는 폭행도 당했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정의로 맞서고 싶은 성숙함과 자신의 감정도 주체하지 못하는 미성숙의 부조화로 인해 홀든은 괴롭다. 지켜보는 보는 이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계속해서 “이건 정말 진짜다.” “맹세코 진심이다.”는 식의 말을 늘어놓는 홀든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모를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사춘기 그 자체로 느껴져 매료당했다.
15년이 지난 후 다시 읽은 지금, 나는 홀든의 성장이 유독 괴로운 <이유>를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은 단지 홀든이 다른 사춘기 아이들보다 좀 더 예민한 감각과 지각을 가졌기 때문일까?
피비가 물었다.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그때 홀든은 제임스 캐슬을 떠올리고 있었고 피비가 재차 물어보자 앨리라고 답했다.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홀든(holden)은 세상을 떠나간 이들을 미처 보내주지 못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아버지와 엄마는 앨리의 무덤으로 가서 그 위에 꽃다발을 얹어놓았다. 처음엔 나도 몇 번 같이 갔지만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무엇보다 그런 엉뚱한 장소에 있는 앨리를 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은 자들이니 비석이니 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해가 비칠 때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두 번이나, 글쎄 두 번이나 비를 만났던 것이다. 무시무시했다. 앨리의 비석에도 비가 내리고, 앨리의 배 위에서 자라는 잔디 위에도 비가 내렸다. 공동묘지 구석구석에 비가 내렸다. 그러자 묘지에 온 수많은 사람들은 미친 듯이 자기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를 미치게 했다. 사람들은 자동차 안에 들어가서 라디오를 틀고 곧 저녁을 먹으러 근사한 장소로 향할 것이다. 앨리만 빼놓고 말이다. 내게는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231~232쪽)
홀든은 심심찮게 앨리를 언급했다. 그리고 자신이 격정으로 치닫는 순간에 앨리와 대화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4남매 중에 가장 가까웠고 아꼈던 동생을 잃었을 때, 홀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차고를 맨손으로 부숴버리는 것이었다. (실제론 그저 약간 엉망이 되었을 뿐이지만) 홀든에게 앨리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지만 그는 미치도록 슬프고 괴롭다. 앨리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등장한 또 다른 죽음.
제임스 캐슬. 여위고 몸집이 작고 약골인데 손목은 연필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그애는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지 않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때 나는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내게도 들렸다. 나는 창에서 무엇이 떨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라디오나 책상 같은 것 말이다. 설마 사람이 떨어졌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다음 순간 모두가 복도를 달려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도 목욕 가운을 입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돌계단 위에 제임스 캐슬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미 숨져있었고 이빨과 피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도 시체에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빌려준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의 방을 침범한 놈들에게 학교 당국이 취한 조치는 단지 그들을 퇴학시킨 것뿐이다. 그 자식들은 형무소에 가지 않았다. (253쪽)
제임스의 죽음에도 홀든이 죄책감을 가질 부분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다른 친구들의 괴롭힘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제임스 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터틀넥 셔츠를 빌려달라고 말했던 제임스의 표정과 목소리가 홀든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사건 당사자들의 처분에 대한 분노도 예민한 사춘기의 이성과 감정을 계속 갉아 먹고 있을 것만 같다.
사실 사춘기란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들은 대개 반항적이고 불평불만이 많은데다 위태롭다. 호르몬 때문이라고 하지만 세상의 결계를 하나 깨부숴야 하는 때이기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유독 홀든은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 일찍 올라선 게 아닐까. 바로 그 둘의 죽음 때문에 말이다.
그래, 경계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홀든은 피비에게 경계를 지키는 사람, 즉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홀든은 파수꾼이긴 커녕 그 경계에서 보호받아야 할 사람처럼 보인다. 더욱이 그가 서 있는 경계는 너무 많다. 아이와 어른, 산 자와 죽은 자, 성스러움과 저속함, 정상과 비정상. 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쯤 되니 자꾸만 홀든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헤아려보려 했던 내가 마치 홀든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건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어쩌면 답은 ‘그렇다’에 가깝겠다. 사실 그는 파수꾼이 아니라 의사가 필요한 상황이긴 하다. 마음에 깊게 베인 상처를 혼자서 꿰매다 그것이 자꾸 덧나고 곪아가는 상황이니까.
요양소에서 부디 상처가 잘 치료됐기 바라며 문득 홀든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상상해본다. 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빨간 사냥모자 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던 그 3일간의 방황 이후 혹시나 제인과 같은 애인을, 아니면 앤톨리니 선생과 같은 또 다른 멘토를 만날 수 있었다면 좋겠다. 그도 아니면 본인과 비슷한 후배를 만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기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유유상종을 비난의 대상에 견주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까. 홀든이 본인과 비슷한 종류의 고민과, 방황과, 일탈을 했던 사람들과 함께 위로하며 치유되고 성장하였길 바라본다. 앤톨리니 선생의 말씀처럼.
“무엇보다도 네가 인간 행위에 대해 당황하고 놀라고 염증을 느낀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런 점에서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것을 깨달으면 너는 흥분할 것이고 자극을 받을 거야.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네가 현재 겪는 것과 똑같은 고민을 한 사람은 수없이 많아. 다행히 그 중 몇몇 사람들은 자기 고민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 너도 바라기만 하면 거기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 그리고 장차 네가 남에게 줄 수 있으면 네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네게서 배울 수 있다는 거야. 이것이 아름다운 상부상조가 아니겠니? 그런데 이건 교육이 아니야. 역사야, 시야.” (279쪽)
세상의 모든 홀든 콜필드여, 그대들의 치열할 앞날에 한 줄기 안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