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의 누런 호박죽
우리 할미, 찬바람 불면 덩굴 사이 늙은 호박 따다가 찹쌀 두둑히 넣어 만든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면 밥알이 새알과 함께 동동. 팥이랑 같이 씹으면 달큰함이 두 배. 찬바람에 허기지는 마음, 속이라도 든든히 하라고 어김없이 낙엽잎 수북히 쌓일 때쯤 할미집 앞 은행나무 아래 아궁이불 때다 은색 솥 올려놓고 휘휘 저어가며 호박죽 끓인다.
하얀색 고무 플라스틱 김치통에 고이 식혀둔 호박죽 그득 담아 찰랑찰랑. 할미의 호박죽은 동짓날까지 지나가는 계절 붙잡아 두듯 우리 집에 항상 있던 음식이다. 할미가 담가놓은 시원한 동치미와 먹어도 제 맛이고, 시큼해진 김치와 먹어도 훌륭하다. 맛있게 먹다 보면 지겨워지고, 또 잊을만하면 생각나는 할미의 호박죽.
시장 갈 때마다 호박죽이 보이는 곳이면 할미 생각에 냉큼 하나 사서 집에 온다. 어떤 날은 주르륵 흐르는 호박 수프인 것도 있고, 어떤 날은 걸쭉하지만 밥알은 찾아볼 수 없다. 어디에도 할미의 호박죽은 없다. 아쉬운 마음이라도 달랠 겸 사온 호박죽 한 봉지의 달큼한 향으로 그때의 맛을 기억하려 세월을 더듬더듬 거려 혀 끝에 상상의 맛을 더해본다.
지난 추석 엄마가 밭에서 따다 놓은 늙은 호박 한 덩이를 보고선, 엄마에게 지겹도록 먹었던 할미의 호박죽에 대해 어디 가도 찾지 못했노라 하소연 한바탕 털어놓았다. 내가 만들어본다며 캐리어 한쪽 옷을 비워내고 그 호박 한 덩이 넣어 집으로 가지고 왔다. 알고 보면 우리 엄마도 할미 그리워 누런 호박 한 덩이 해먹지도 못하고 보려고 따다 놓은 걸 수도 있는데 내가 냉큼 가져와버렸다.
동네에서 할미가 제일 예뻤다는 할배. 우리 할미는 밭에서 일한다고 허리가 굽었지만 얼굴만큼은 세상 그 어떤 할미보다 고왔다. 우리 할배 말이 맞지. 우리 고운 할미는 나 오면 항상 하는 인사말이 있다.
“입술이 왜이리 시퍼렇노?”
입술색 시퍼렇기는 커녕 혈기 왕성한데, 찬바람에 입술 튼 모양새 보고선 사시사철 인사말처럼 입술색 퍼렇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립글로스 잔뜩 바르고 가도 할미 눈에는 매끈한 입술이 아닌가 보다 했다. 할미를 하늘나라 보내놓고 이제서야 할미의 인사말이 경상도식 사랑한다는 뜻인 것을 몇 번을 곱씹어 보고서야 알아챘다.
우리 할미 가기 전에라도 말해주지. ‘그거 사랑한다는 말 아이가.’ 하고 툭 던져놓고 가지. 우리 할미 나 생일 축하 한다 해주고 가려고, 마지막 그 한마디 말 하고 싶어서 내 생일에 하늘나라 갔나.
부산에서 가져다 놓은 호박 보면서 할미 생각 하느라 아까워서 죽으로 끓여보지도 못했다. 내가 쑹덩쑹덩 썰어 호박죽으로 끓여버리면 훌떡훌떡 먹고 할미 생각 안 할까 싶어서. 계속 할미 호박죽 생각하려고 우리 집 주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누런 호박은 여전히 자리 차지 하고 있다. 할미 생각하려면 그 정도 자리는 내어주어야 할 것 같아서.
시장에서 늙은 호박 새로 하나 사와 호박죽 끓여야겠다. 우리 할미는 계속 내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하니 그 누런 호박은 그리 두고, 새로 사 온 호박으로 죽 끓여 찹쌀 넣고 새알도 띄우고 팥도 덜큰하니 넣어 만들어야지.
부산에 들고 가 아빠 엄마한테 내가 할미맛 호박죽 만들었노라고 나눠줘야지.
내가 멀리 대학 간다고 울었던 우리 할미, 내가 부산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꿈속에 놀러 오면 내가 할미한테 꼭 알려줄끼다.
‘할미! 입술 퍼렇다가 아니고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는기다. 알겠제? 나도 할미 사랑한다. 윽수로 많이 사랑했디. 알제? 내 생일 마다 할미가 생일 축하해 주고 떠난 거 안잊을끼다. 우리 할미 사랑 어찌잊겠노. 내 평생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