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신, 살아간다

바람난 국수 2부

by SAY

요양원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갔다. 가끔 외부 강사 프로그램이라도 있는 날이면 북적였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몇몇은 복도 끝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거나 TV 앞에 모여 수다를 떨다 흩어지고 나면, 다시 조용했다.

창밖으로는 봄기운이 아른거렸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흙냄새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텃밭에도 서서히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 텃밭 한편에서 말순은 익숙한 듯 흙을 고르고 있었다. 자유시간이면 늘 같은 자리였다. 그때, 정원을 지나가던 복지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생일잔치 때도 대장님이 자장면 쏘실라나?"

작은 화단에 가려져 복지사들은 말순이 가까이 있다는 걸 몰랐다.

"작년도 쐈잖아."

"덕분에 다들 잘 얻어먹었지."

"근데 올해도 쏠까요? 우리야 좋지만, 대장님도 아들 보고 싶지 않겠나?"

짧은 한숨 소리가 섞였다.

"보고 싶었으면 모시고 살았겠지. 요양원에 뭐 하러 맡기노?"

"그러게요."

그저 농담처럼 흘러가는 말들이었지만, 말순은 손끝에 힘이 빠졌다. 괜찮다고, 익숙하다고 생각했건만, 마음 한구석이 바보같이 또 기대고 있었다. 올해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생일만큼은 얼굴을 비추지 않을까 하는, 자꾸만 속으로만 꺼내는 그런 기대. 해마다 봄이면 한 번쯤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쯧."

말순은 혀를 차고 모종삽을 다시 들었다. 파두었던 흙을 덮으며 작은 모종 하나를 심었다. 흙 위로 손바닥을 대고 꾹 눌렀다. 마치 오래된 기대를 흙 밑에 묻어버리듯, 심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순애는 금전출납부에 오늘 아침 먹은 메뉴를 적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순이 흘깃 보며 시비를 걸었다.

"뭘 그리 적노?"

순애는 잠시 손을 멈췄다. 장부를 덮으며 천천히 말했다.

"이것저것 정리하는 기라."

"뭔 정리?"

"오늘 뭐 묵었는지, 뭐 했는지… 그런 거 적는 거죠."

말순은 비꼬듯 중얼거렸다.

"치매 왔다면서 글자는 잘도 적네."

순애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말순은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 오히려 속에선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참말로 좋겠네. 아침, 점심, 저녁, 끼니때마다 아들 얼굴 볼 수 있으니께."

그 말에 순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한 눈빛이 말순의 눈을 조용히 마주했다. 말순은 그 시선을 더는 받아내지 못했다.

"예, 좋지요. 직접 보진 못해도, 만지진 못해도 느낄 순 있거든요. 그래도… 욕심이 나서 자꾸 서럽네예."

말순의 입술이 덜컥거렸다.

"나도 아 있다. 지만 아들 있는 줄 아나. 우리 아, 박사 됐다 아이가. 바빠서 그렇지.""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허전한 틈이 묻어났다.

"박사라 바빠. 박사라."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말했다. 순애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툭 내뱉었다.

"저는 못나서 우리 아를 배달이나 하게 만들었네요. 그래도 얼마나 미안하고 또 고마운지 아십니꺼. 대장님은 대장님 나름으로 참말로 대단하십니더."

말순의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그래. 잘났다. 박사 돼서 병원 차리고 돈도 잘 벌고, 이번엔 팔보채도 좀 시켜 묵을라 했데이."

"예, 예. 나는 좀 누울랍니다."

순애는 이불을 덮고 누웠고, 말순도 등을 돌려 눕고 말았다. 모처럼 큰소리로 떠든 말순이었지만, 왠지 김이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오전 11시 반, 배달을 마친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판을 비우며 오전에 겪은 일들을 풀어내던 중, 중수와 민기는 주차장 한켠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와 오늘따라 길 왜 이리 막히노. 미치겠더라 진짜."

"금요일이라 그렇지. 원래 꽉 찬다."

중수는 담배를 문 채 허공을 바라봤다. 민기가 슬쩍 그를 살폈다.

"형님, 요즘 무슨 걱정 있습니꺼? 계속 멍 때리대이."

중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니다. 별거 아니다."

민기는 대꾸 대신 담배를 탁탁 털었다. 잠시 후 중수가 입을 열었다.

"민기야. 너 요양원 어르신들 보면 무슨 생각 드나?"

민기가 눈을 껌뻑였다.

"뭐… 안쓰럽지예. 가족 대신 우리가 밥 챙기잖아요."

"그래. 가족 대신."

중수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휘어졌다.

"저도 그렇지예. 솔직히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요양원 맡기면 혹시 부모님이 버려졌다고 생각하시믄 어쩌노 싶기도 하고."

민기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근데 형님 어머님은 좀 어떠십니까?"

중수는 대답 대신 담배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모르겠다. 괜찮다고만 하시지."

그때, 식당 안에서 태곤이 나오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야, 최민기. 니는 결혼 안 하냐?"

"돈도 없는데 뭘 합니꺼. 여친은 동거하자 카는데 몸 하나도 먹여 살리기 벅차 죽겠구만예."

"이놈아. 내 젊을 적에 독일 탄광까지 가서 니들 같은 자식들 다 키웠다."

태곤은 헛웃음을 흘렸다. 민기는 툴툴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런 말 하면 꼰대 소리 듣습니다. 요즘은 돈 없으면 연애도 못 한다니깐예."

"그래도 인생 다 돈 핑계 대다가 그냥 흘려보내는 거는 똑같다."

태곤은 담배를 비벼 끄며 중수에게 말했다. 중수는 말없이 담배를 손에 쥐었다.

"애 키우는 게 힘든 게 아니고, 키우고 난 뒤부터 책임이 무거운 거지요."

태곤은 중수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글마. 그럴 수도 있겠지."

중수는 알았다. 순애가 평생 쥐고 살아온 그 책임의 무게를. 그 무게가 이제야 조금씩 중수의 어깨 위에도 얹히고 있었다. 그 순간, 태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도… 다 돈 핑계 대다가 인생 다 흘려보내는 건 똑같다.'

말없이, 그냥 그렇게 가슴으로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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