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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OO Aug 15. 2022

요리와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일하기

컨설팅펌에서 프로젝트로 시작해 오랜 대기업 생활을 거치며 내가 일을 배우고 해온 방식은 예를 들면 이렇다. 요리학원을 끊고 요리책을 사서 좋은 강사에게 하나하나 계량해 가며 배우는 방법. 김치찌개 하나를 끓이려 해도 시중 유명하다는 맛집이나 좋은 레시피라는 것들을 스터디하고 이것저것 조금씩 차용해 간다. 그중 가장 내 입맛에 맞는 레시피를 택해 해먹고, 때로는 다른 레시피도 응용해 변형도 해보며. 이때 재료 준비, 손질, 간, 양념, 양 등은 사전에 계량되어 순서대로 착착 진행하게 된다. 질릴 만큼 먹던 된장찌개에 물려 좀 다른 맛은 없는가 하면 또 찾아본다. 다른 집에선, 다른 학원에서는, 다른 레시피에서는 어떻게 끓이는지 찾아보고 그중 이거 좋겠다 싶은 걸 또 만들어 본다. 애초에 오늘 저녁은 한식이란 콘셉트를 잡고, 김치찌개면 김치찌개, 불고기면 불고기 같이 메인 메뉴를 잡은 후 그에 곁들일 다른 반찬들을 준비한다. 너무 빨간 음식뿐이면 간이 삼삼하고 하얀 다른 음식을 준비하는 등 말이다. (여기까지를 A라 하자)

출처: http://abit.ly/h6kagq


스타트업에 나와 직접 일을 해보고, 다른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니 그간 내가 배우고 해온 방식과는 좀 다르구나를 알게 되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방식은 애초에 오늘은 한식, 양식이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메뉴들을 배치할지 계획을 세운 후 각각의 메뉴를 준비하는 게 아니다. 당장 김치찌개가 먹고 싶으면 이걸 끓인다. 어깨너머 누가 끓이던 걸 보고 듣고, 그냥 이렇게 해보자 하며 만들어 보기도 한다. 학원을 끊고 각종 레시피를 스터디한 후 미리 준비한 재료와 타이머에 맞춰가며 착착 끓이지 않는단 얘기다. "다들 집에 레몬그라스나 캐비어 정도는 가지고 계시죠?" 같은 도무지 와닿지 않는 거창한 레시피보단 "10분이면 먹을 수 있는 가벼운 찌개", "이것만 있음 끝, 백주부표 만능간장" 같은 레시피에 더 쏠린다. 이런 레시피가 어딘가 실리거나 책으로 발간되면 SNS엔 일제히 공유되고 이 레시피를 공부하며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걸 B라 하자)


대기업에서는 "찌개 하나 끓이는 데 너무 느리다, 우리도 변해야 한다"며 스타트업의 레시피를 좀 보고 배우자 하고, 스타트업에서는 우리도 이제 '제대로 찌개 한 번 끓여보자'며 학원을 끊고 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방식에 근접해 가며 접점을 찾아간다.


학원수강식으로 HR을 배우고 일해온 나는 스타트업에 나와 "태양초 고춧가루, 이번엔 마늘, 이번엔 뭐뭐"하는 식으로 배운 대로 뭘 하려 참 많이 노력했더랬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이들이 많이들 그렇다. 첫 스타트업을 거치고, 많은 스타트업의 과제를 수행하며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건 페퍼론치노가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더 많고, 때론 이 대신 훨씬 저렴하면서도 엇비슷한 베트남 고추 정도 넣어도 된다는 거다. 배운 대로 요리 하나 할라치면 없는 재료가 태반. 그럼 다 살 것이냐.. 어떤 때엔 된장찌개에 고추장 좀 풀어 넣어도 되고 아니어도 그만이란 거. 차돌박이가 아니라 돼지고기를 넣어도 되고 그나마도 고기 없이 두부, 호박만으로도 충분히 맛있게 끓여 먹으면 그만이라는 것도. 또 어떤 때는 그저 한끼 잘 나면 될 뿐이라는 것도.


그럼에도 차돌된장찌개 먹어본 게 전부이면서 "누가 된장찌개에 차돌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넣니?"라든가, 어디서 얄팍한 요리책 한 권 읽어 놓고 "원래 된장찌개는~"이라며 '원래'란 말을 하는 B를 어렵지 않게 본다. 반대로 "집에 어떻게 월계수잎이 없니?"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떻게 집에 소금이 없을 수 있니?"처럼 '당연히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게 없음에 뜨악하는 A를 심심찮게 본다. (소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건강식으로 슴슴히 먹음 되는 것을....)


중요한 건 B는 뭐가 없었기에 열심히 배우고 해보려 하지만 경험상 일정 분야에서는 A만큼 그 범위와 양이 축적되기 어려움에도 자기가 아는 고작 몇 개의 레시피 내에서 정답인 양 얘기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스타트업에서 각광받는 것들 중엔 이미 진작에 대기업에서 해볼 만큼 해보고 유행이 지난 것들도 많다. (예를 들면 MBTI는 2000년대 초중반 TA, DISC와 함께 기업교육 시장을 휩쓸고 뒤안길로 가있던 검사다. 넷플릭스의 컬쳐덱 이후 컬쳐북, 컬쳐덱 등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도 이름만 다를 뿐 미션, 비전체계도 혹은 별 다른 이름 없이 신규입사자 교육이나 워크숍 등에서 우리의 일하는 방식, 조직문화란 이름 하에 주구장창 만들어지고 진행되어 오던 것이기도.)프로덕트오너 책 한 권이 모든 회사, 모든 PO가 그 책에 나온 대로만 일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이들을 양산해 낸 거나, 규칙없음의 투명하고 솔직한 소통이 국룰인 것처럼. 


A는 갖춰진 조직을 떠나면 더 이상 모든 재료를 손질해 준비하고 레시피를 아이패드에 띄우고 선생님 지시에 따라 착착 요리하는 정제된 주방에서 요리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천천히 만들며 화려하고 고급지게, 건강식이니 하며 재료에 공을들여 있어빌리티를 가득 담아 낼 수 없을 가능성도 높다. 빠르게 착착 필요한 최소한의 요리를 내야 하는 상황에 무수히 내던져진다. 때문에 없어서 한숨 쉴 게 아니라 "그럼 비슷하게 뭘 넣음 되고, 빼도 그만인 게 뭐더라"를 고민하든가, 그간 배운 각 재료별 특성과 맛경험, 조리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보는 등 응용까지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찐역량이다. 이게 싫다면 "내 거기 가서 주도적으로, 제대로 된 된장찌개를 끓여 낼 거다"외칠 거 없이 그냥 잘 차려진 주방에 있는 게 낫다.


한쪽에 확 치우친 이들을 볼 때면 나 역시 치우쳐져 있다가도 경계인으로 화들짝 돌아오곤 한다. 양 조직에서 어떤 때엔 A 입장에서, 어떤 때엔 B 입장에 섰다가도 또 어떤 때엔 A와 B 모두에 제 3자의 입장으로 보게 되곤 하는 경계인으로 이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이냐가 늘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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