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SOO Dec 24. 2022

비전이니 핵심가치 말인데..

10년 넘게 미션, 비전, 핵심가치를 정립하고 전파하는 일을 했다. 그만큼 관련 스터디도 많이 했고 끊임없이 토론해 개념을 도출하고 다듬기도 했다.


스타트업에 오니 대기업보다 비전이나 핵심가치를 더 강조하고 컬쳐덱도 많이 만들며 언급도 많이들 하더라. 여러 제약이 많고 불확실한 환경에서 이것들이 보다 강조될 필요가 있기도 하지만 관찰자 입장에서 대기업의 액자 속 비전이란 비판만큼 스타트업의 그것 또한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갭이어 기간 만난 회사들 중에 디테일하게 핵심가치를 정리한 곳이 꽤 있었다. “우린 진짜 이것들을 엄청 강조합니다, 면접에서 이만큼이나 구체적이고 집요한 질문을 해서 뽑아요”라든가 “철저히(?) 이 기준으로 평가하고 보상해요”라는 곳도.

이들은 하나 같이 "그래서 채용이 힘들어요"를 말하지만 들여다보면 무쟈~게 높은 채용실패율과 퇴사율을 보인다. 건너건너 들어보면 정작 조직 관리가 잘 되는 거 같지도 않은데 이런 회사 사람들이 훈수질도 많이 하더라.


경험상 하나 배운 게 있다면 뭘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게 리스크가 더 클 수 있다는 거다. 어차피 아무리 구구절절 정리한 들 다 담기 어렵고 되려 상세화할수록 약간의 예외나 그레이존이 튀어나오면 더 쉽게 일관성이 훼손된다. 세련된 커뮤니케이션 역량과 리더십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강력한 핵심가치와 그에 대한 집착은 되려 독이 되기 쉽다. 그래서 부족하니 만들지 말란 얘기냐 하면 당연히 아니고 다만..


대단히 원대한 조직 비전을 그리고 창업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런 거 없이 시작하는 기업도 수두룩 하다. "이 사업 될  거 같은데", "이 문제 풀고 싶은데", "이 업계를 바꿔 버릴 거야"로 출발한 회사 말이다. 이건 어떤 사업을 하는 회사를 만든 거지 어떤 조직문화를 만들겠다와는 다르다.


회사가 성장하면 '우리도 비전이니 핵심가치이니 좀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며 '만들어야 한다'로 가기 쉽다. 후자로 출발한 회사라면 가치를 만들려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조직을 관찰해 역으로 우리 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난 앞으로 뭘 하고 싶다는 걸 구체화하는 방법이 있듯, 지금까지 우린 뭘 해온 회사인가를 들여다보는 방법도 있다는 거다. (‘난 이런 사람이 되고 말 거야’ vs. ‘나 이런 사람이었네, 그럼 이런 걸 선호하고 잘하니 앞으로 이렇게 하면 되겠다’)


뭘 가장 중요시해왔는지, 뭘 우선순위에 두었는지, 갈등이나 딜레마 시 어떤 기준으로 주로 판단을 해왔는지, 지금 중요한 전략은 무엇인지, 그걸 추진하는 과정에서 선호하는 방식은 무엇이었는지, 강조하고 본다고 봤는데도 왜 채용실패가 있었는지, 그 사례들의 교집합은 무엇이었는지,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타협하지 말자" 했던 건 뭐였는지 등등.. 예로 인재상을 만들고 면접 질문을 촘촘히 짜기보단 (그래 봐야 면접관의 '사람 보는 감'이 더 나을 때가 많기도) 채용의 성공, 실패 경험을 한동안 쌓아가며 데이터를 축적해 보는 게 낫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이런 걸 좋아하네, 이런 건 아니네, 잘하는 건 뭐였네를 발견해 하나씩 구체화해나가면 된다.


전문가, 책 등에서 초기부터 비전이나 가치가 세팅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게 다 정답은 아닐 거다. 다 각자의 방식이 있고 속도와 순서가 있는 법이다.


* 정작 제품은 MVP며 실험이란 말로 "뭐 된 게 없냐?" 수준으로 내놓고 조금씩 개선해 가면서 말이다. 제도도 그래도 된다.

작가의 이전글 작은 회사의 리더 뽑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