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운 게 없다!"
막장 드라마에서 진상 시어머니가 맘에 안 드는 가난한 며느리감에게 멸시를 가득 담아 내뱉을 법한 대사. 주로 매우 부정적으로 쓰이는 이 말은 훨씬 담백하게 상황과 사람을 평가하고 이해할 때에도 쏠쏠히 사용할 수 있다. 직원과 리더, 나아가 경영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자기 객관화를 포함해 두루두루. 그래서 난 이 표현을 많이 쓰고 이걸 기준으로 인풋을 넣을 지 말 지, 챌린지를 해야 하는지 우선은 피드백하고 다독여야 하는 지 등을 결정하곤 한다.
장면 1. 구성원
회사에서 일이 시원찮을 때 사용 가능하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하는데요.", "일이 너무 많아요.", "~는 일을 정말 잘해요." 같은 말을 듣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진짜 일을 많이, 잘, 열심히, 치열하게 하는 모습을 누구를 보며 회사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그 수준이 천차만별.
널럴한 회사일 수록, 사회 초년생일수록, 그냥저냥 딱히 치열할 필요 없이 담당 업무 처리만으로도 충분한 회사일 수록, 여기에 사회 초년생이 이런 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할수록, 리더 역량이 낮을 수록 그 수준은 낮아지기 쉽다. A회사에서의 열심과 잘이 B회사, C회사, D회사와 각기 다르다.
정체된 중소기업, 영세기업, 업력 적은 초기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스타트업의 경우 창업자와 사업 모델의 성격과 스펙에 따라 같은 영세, 초기 기업이어도 출중한 이들이 모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초기엔 좋은 인력을 모시기 어려운 법이다. 때문에 초기에 모인 이들은 현실과 타협해 그 시절 최선인 인력으로 채워지기 쉽고 시스템이나 프로세스를 갖추기 어려우므로 보고 배울 만한 사람, 일의 퀄리티, 요구 수준도 경험하기 어렵다. 이 경우엔 열정이나 노력, 역량을 논하기 전에 말 그대로 좋은 본보기의 샘플을 보고 배우지 못했기에 인풋을 많이 넣어줘야 한다.
장면 2. 리더
리더 같지도 않은 리더, 리더가 뭐 저래, 리더십이 어쩌구저쩌구..
장면 1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직은 조직의 성숙도와 경험의 축적이 되지 않은 시기에는 리더에 누가 있다 해서 리더다워 그 자리에 있는 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조직이 조금씩이든 급격하게든 커지면 누군가는 리더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하지만 그때 까지도 경험 많고 우수하다 할 만한 리더급 영입이 원활히 되는 건 아니므로 기존 직원 중 연차가 좀 높거나 나이가 있거나, 경력직이지만 썩 좋은 리더는 아닌 이가 그 자리에 오른다. 교육프로그램이 많은 대기업 같은 곳에서는 신임 팀장 교육, 때 되면 하는 팀장 교육, 혹은 팀장 후보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한다. (교육 효과가 있다고는 모르겠지만) 교육과 별개로도 리더 자리에 오르기까진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등을 거치며 오랜 기간이 필요하고 그 사이 수많은 주변, 팀의 리더들을 보게 된다. 그들의 리더십이나 능력치와 별개로 타산지석이 되든 롤모델이 되든 보고 배울 것들이 널린 셈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탁월하던 실무자들이 초임 리더 때 힘들어한다.
다시 돌아가 앞선 조직에선 이런 경험의 축적이 어렵기에 리더들이 우수하기 어렵다. 잠재역량과 노력을 떠나 리더들이 좋은 리더들을 보고 배울만한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본인 스스로 좋은 코칭이나 매니지먼트를 받은 경험이 드물기 때문이다. 최근 스타트업에서 원온원이니 코칭이니 하는 키워드가 화두이지만 리더십은 여전히 어렵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조직에서 리더가 되는데 받아 보지 않은 걸 책과 강의로 충분히 숙고하며 나만의 리더십을 만들어 가기엔 눈앞의 현안이 수두룩하고 상황은 변화무쌍하다. 나는 배운 적도 없는 걸 날이 갈수록 리더십에 대한 요구는 높아지니 어려울 수밖에. 그래서 이들에겐 직무를 넘어 좋은 선배 리더가 절실하고 그들의 피드백과 코칭이 중요해진다.
장면 3. 경영진
어느 순간 회사가 커지고 투자라도 크게 받게 되면 경영진의 눈이 달라진다. 불과 근래까지도 투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대규모 채용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 시기 "이젠 우리도 우수한 인력!"을 외치며 큰 회사 출신, 유명세 있는 인력, 전문가라는 이들을 본격 영입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스타트업에서 이런 경력자들이 너무 잘한다는 말보다 부정적 평가를 더 많이 듣는다. 원래 칭찬보다 데인 것에 더 들끓기 마련이니 그럴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렇다. 스타트업에서는 중량급이지만 실제 큰 기업 재직시절엔 리더 경험 부재, 부분적 깊이로 일하던 이들이 주를 이루기에 겪는 시행착오도 물론 있지만 이와 별개로 고려해야 하는 포인트는 경영진의 보고 배운 바 없음이다.
창업 초기 채용이 녹록지 않던 시기에 채용 가능했던 수준의 직원들과 일해 왔다면 본격적으로 영입되기 시작하는 경력직들 정도의 인력을 데리고 일해본 경험은 없지 않겠나. 이런 경력직들이 부족할 망정 이전 인력보다는 경험이 좀 더 있다는 전제 하에선 경영진도 이런 경력직들과는 일해본 경험이 없을 가능성 말이다. CEO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창업 이래 가장 좋은 인력과 일하는 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잘 다루는 법,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들의 경험치를 끌어내는 법, 경험과 강점 외의 온갖 기대를 덜어내는 법은 보고 배우지 못한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력직들은 이전 멤버들과는 다른 성격의 비판을 하거나 의견을 낸다. 이전엔 제안이나 불만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들은 지적과 가르치려 한다는 얘기가 주인 것 같다. 얘기를 듣다 보면 스스로 부족했다 인정하던 것도 기분 상하기 시작하고, 이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말이나 하는 거 같으며 이런 회사에 왔으면 이것저것 하는 거지 왜 안 한다는 일이 많지 같은 불만이 생긴다. (물론 그런 면도 많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후에 왜 그게 필요한지, 지금부터 이걸 하지 않으면 어떤 이슈들이 발생하는지, 아직 다음 수준의 조직을 경험한 적 없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방식을 넘어가기 어려워 필요 없다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경력직엔 목표를 협의해 정하고 그게 정확히 뭐냐를 확인하고 설명을 요청하는 방식, 아웃풋을 제시하고 체계화하길 요구하는 게 좋다.
장면 4. 경력직
이런 회사에 합류한 경력직들도 마찬가지다. 저들을 보며 "보고 배운 게 없어"라 비난하기 쉽지만 본인도 별 다를 바 없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프로세스와 시스템 잘 갖춰지고 (그런 회사에도 이상한 사람은 널렸지만) 상대적으로 상향평준화된 인재들로 구성된 큰 조직에서 일했다 치자. 리더십이 어떻든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경험과 나이, 실력을 가진 팀장과 임원 아래에서 일했고 가장 일 잘한다 했던 초 핵심 인재가 CEO가 되는 법이기에 작은 회사의 CEO와 리더가 후지게 느껴진다. 이전 회사에서도 이상하고 일 못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래도 일이 돌아가고 수직적으로 CEO-임원-팀장으로 내려오는 업무 수행에 집중되기에 대단히 개의치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작은 조직에 합류하면 자신이 선임이 되어 있고, 얘기를 해도 잘 모르거나 반발을 한다. 그럼 왜 저렇게 일하는지, 왜 이리 못 알아듣는지로 시작해 무시하게 되고 불만만 커지게 된다.
여기서 잘 생각해 보자.
앞서 파운더가 창업 이래 가장 좋은 인재와 일하는 상황에 합류하면 경력직 입장에서는 직장생활 이래 가장 수준 낮은 환경에서 일하는 게 된다. 시스템빨, 프로세스빨, 선배빨이 떨어진 보고 배운 적 없는 환경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거다. 환경이 어떻다를 비난하기 전에 본인 선택이고, 보고 배운 적 없는 이 환경에서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 지를 훨씬 더 많이 고민하고 직접 수행해 보여주어야만 한다.
스타트업에서 경력직을 영입하고 대표님들이 불만족할 때 '핏이 안 맞는 거 같다'란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 핏이라는 게 가만히 듣다 보면 명확한 실체는 없더라. 2~3개월 짧은 수습 기간 중 경력직이 별로다 판단할 때엔 인성, 현저히 떨어지는 업무능력이 아닌 다음에는. 경력직은 리더십이 부족할지언정 어쨌든 일을 하고, 그 수준이 다르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래서 경력직 역시 '보고 배운 적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에서 뭘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거. 이땐 입이 아니라 그냥 일을 해서 결과물로 보여주는 게 최선.
"보고 배운 게 없다"란 말은 단순히 상대와 조직을 비난하는 데에 쓰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이 상황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쓰면 된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래서 뭘 해야 하는지를 찾아내고 하나씩 실행하는 데에 집중하기도 바쁜 걸. 때론 그게 헤어짐일 수도 있고, 챌린지일 수도 있으며 칭찬일 수도 있고, 보고 배우게 할 영입일 수도 있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