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이고 기본임에도 버젓이 벌어지는 일 중 하나가 익명 설문의 who를 '색출'하는 일이다.
조직문화, 리더십, 다면평가 등 누군가가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건설적인?) 피드백 제공을 위해 실시하는 건들을 익명으로 진행할 때가 많다. 익명실시의 배경은 솔직한 의견을 듣겠다는 것인데 이미 여기에서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하튼 익명설문을 받으면서 조직책임자가 누가 어떤 답변을 했는지 가져오라는 경우가 생각보다 꽤 있다. 예전 어느 회사는 리더십이 최악이었던 임원이 리더십 평가결과가 바닥으로 나오자 인사팀을 뒤집어엎어 응답자를 색출했다. 이후로 그 조직은 대충 좋은 점수 주고 마는 조직으로 몇 년이 흘렀다.
리더십과 조직문화 진단을 몇 년 담당했었다. 당시에 담당 실무자 둘을 제외하고 팀장이나 CHO에게도 절대 답변자 정보를 노출하지 않았다. 그룹 차원의 진단 등은 아예 실무자들에게도 이름이 노출되지 않기도 한다. 간혹 익명에 숨어 저격하고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문제 답변도 있는데 내 리더들은 한두 번 정도 누구냐 물었을 뿐 로데이터를 요구한 적도 없다. 달라고 해도 준 적도 없었고.
진단하고 분석하는 담당자는 말 그대로 분석해야지 답변에 평가, 판단을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특히 조직, 사람에 대해서. 데이터가 쌓이면 마냥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수는 없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결과를 분석하고 전달하는 담당자로서는 객관적 메신저 역할을 해야 한다.
익명 설문에서 "누가 이렇게 답했는지 가져와"라고 당당하게 담당자에게 요구하고 있다면 쪽 팔린 줄 아셔야 한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이런 사람은 정말 도려내야 하고 등의 온갖 이유를 대며 합리화할 거고 진심으로 그렇게 하는 게 일을 잘하는 거라 보고 배워 믿고 있을 수도 있지만.
담당자도 이게 아닌데, 어쩔 수 없이라며 물음표와 불만은 가득하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면 창피해하고 모욕적이라 느껴야 한다.
일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건 대단한 성과를 내고 전문성(대체 그놈의 전문성의 실체는 무엇인지..) 있어빌리티 추구가 아니라 이런 원칙과 양심부터 출발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