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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work & life balance의 위험

by SSOO

가장 돈과 실리콘밸리발 도서, 용어가 넘치던 2020~2021년에 스타트업에 들어왔다. 이때 어이없던 것 중 하나가 가본 적도, 갈 수도 없는 사람이 대기업 무시하고 스타트업 뽕에 가득 취해 거드름 피우는 거였다. (요즘 문해력 떨어지는 사람이 많아 노파심에 말하는데 대기업 우월감 아님!)


까놓고 편안하니 올드하니 깔보는 대기업에 가고 싶어도 못 갈 사람이 압도적인 비율인 게 이 시장이고, 경험과 실력 대비 과도한 연봉을 받는 시장도 이곳이다. 여기엔 대기업 출신이라지만 사원 대리, 좀 더해도 과장쯤 하다 나온 사람도 포함된다. 이런 이들이 “나도 대기업 다녀 봐서 아는데”라며 그 후광은 다 받으면서도 별 볼일 없다며 말을 보탠다.


비효율도 많고 모수가 많은 만큼 큰 조직엔 느슨한 사람도 많지만, 그곳에서 진짜 잘하는 사람은 또 레벨이 다르다. 미련하리만치 사력을 다해 일하는 가진 거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넘친다.


내가 무서웠던 건 20년 전에도 월에 수천 벌던 일타 강사들이 밤새 교재 연구하고 하루에도 10개 넘게 수업하던 거, 날고 기는 스펙 갖고도 밤새워 일하던 컨설턴트, 수천억 자산가임에도 가장 열심히 일하던 사업가, 핵심인재 풀이 아님에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던 대부분의 동료였다. 조직의 비합리적인 열정 노동 강요도 만연했지만, 별개로 연봉과 성공보다 매 순간 일에서 승부 보고 싶어 일에 기꺼이 파묻혔다.


회사에 충성하는 시대는 지났고 권장할 일도 아니다. 무조건 야근하고 소모되라는 것도 아니고. 무슨 얘기냐 하면 뭔가 일과 실력을 쌓고 객관적 인정도 받으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 하더라는 거다. 그렇다고 다 성공하냐 하면 그렇진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나와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이들을 앞지르진 못해도 내 리그를 만들어 갈 수 있고, 최소한 나이와 연차 쌓여가며 도태되는 걸 늦출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영리한 게 뭔지, 내꺼 챙기는 게 뭔지 모르는 듯한 분들을 볼 때 좀 안타깝다. 간식비, 점심값, 무제한 휴가.. 이런 건 단 1원도 손해 보려 않는데 그게 정말 이기적이고 똑똑한 걸까.


내 일에 열을 다해 배우고 성의를 다하는 걸 마치 회사에 충성하고 손해보란 거냐, 야근 하란 거냐 발끈부터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화 의지가 사라진다. 퇴사할 때 그 노력과 내 머리를 두고 나오는 게 아닌데 말이다. 술자리 험담은 할지언정 요행과 쉬운 길을 정답처럼 떠벌리는 선배나 동료들과 일하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벌라는 건 소망이고 덕담이지 실력이고 권리인 건 아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속담은 다소 극단적이긴 해도 커리어와 성장에 대입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별 성과 없이 잦은 이직으로 수십 % 연봉만 잔뜩 올린 사람들 중 요즘 같은 혹한기엔 높아진 눈에 이직이 전 같지 않은 이가 상당할 거다.


어린 나이에 이직을 통해 빠르게 연봉을 억대로 올렸다 치자. 하지만 연봉이라는 게 무한대로 2, 3, 4억으로 오르는 게 아니고 그런 사람이 있어도 나는 아닐 가능성이 대부분이다.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었을 때에도 연봉은 정체(?)되거나 오를 대로 오른 연봉은 이직해도 슬라이딩되면 다행일 거고. 하지만 구성원이나 상사는 연봉 대비 실력을 점점 더 냉정하게 볼 거다.


이쯤 되면 선택은 크게 두 가지인데 불만은 있지만 이 정도도 만족한다 머물거나 자의든 타의든 창업하거나. 전자는 임직원의 평가를 감내하며 불만과 불안을 오고 가고, 후자는 직원들이 왜 이러냐 한숨 쉬며 “얜 왜 이리 이직이 많아, 실력도 이 정도는 아닌데 왜 이리 연봉이 높아, 요즘 애들은 일을 안 하려고 해”라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이력서 화려한데 별 볼일 없더란 말은 흔하지 않던가. 어느 쪽이든 길게 살아 남고 인정받으려면 탄탄한 내공이 훨씬 중요하더라.


뭐가 옳고 그르냐, 효율이냐 비효율이냐는 다른 얘기다. 단지 물리적 장소와 시간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고! 치열함과 진짜 절박감, 염치에 대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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