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것에 답할 수 없는 존재로, 그 등 뒤에 서 있다.
자, 지금부터는 상상이다.
나는 아직 아버지가 아니다.
이 글은 미래의 어떤 순간,
아이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출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사유의 실험이다.
아이의 질문 앞에서 나는 어떤 등을 가질 것인가?
지능이 높거나 낮거나,
혼자 사색하는 아이일 수도 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풀 냄새를 사랑하거나,
시멘트의 각진 구조에 안정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그 어떤 아이가 내 품에 도달할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특정할 수 없음”이야말로,
내가 아이를 대하는 첫 번째 태도가 될 것이다.
그 아이는 나와 유전자를 공유할 수는 있지만,
그 사고의 근원점, 그 아이의 우주는 분명히 나와 다르다.
그리고 나는 그 다름을 사랑하고 싶다.
이를테면, 아이가 나에게 묻는다.
“아빠, 왜 공룡은 다 죽었어?”
그 질문에 나는
운석 충돌설이나 종의 진화 이론을 꺼내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래? 너라면 공룡이 되고 싶었을까?”
아이의 세계 안에서
질문은 답보다 더 중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개연성을
같이 탐구하고, 재촉하지 않고,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고,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며 함께 자라가고 싶다.
나는 ‘함께 성장하는 아빠’이고 싶다.
가정이란 안정성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아이의 눈으로 다시 세상을 의심하고
사유하는 황금기의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하지만 문득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런 아빠가 과연 아이에게 만족스러울까?”
불확실성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고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 이데올로기, 물질의 명확함에
목을 매는지도 모른다.
아이도 그럴 것이다.
순진무구한 시절이 지나고,
처음으로 친구와 원치 않은 이별을 겪게 되었을 때,
아이의 삶에 사라져가는 것들이 생겨날 때,
그는 아마 내 모호함에 질식할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히 모든 것에 답하지 않았고,
어떤 순간에는 침묵했고,
어떤 순간에는 외면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바란다.
그 아이가 언젠가,
내 취약한 인간성을 이해하게 되기를.
내가 말하지 않은 이유,
내가 판단을 미룬 이유,
내가 확언을 피한 그 순간들을
그 아이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주기를.
그 해석이 우리의 철학이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나는
나의 등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것에 답을 줄 수 없는 사람이었고,
모든 순간에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를, 그 아이만의 방식으로 사랑했노라.
그 아이가 언젠가
내 등에 환멸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등 뒤에서,
그 아이의 내면에 말을 걸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조차
그 또한 사랑의 일부였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서로 너무 취약했기에,
결국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말이라는 유한한 매개를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버지됨의 완성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