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지 않음으로써, 나는 아이의 세계를 믿는다.
작고 귀여운 아이가 그만 너절하게 넘어진다.
얼마나 아플까,
벌써부터 가슴이 쓰리고 미어진다.
하지만 나는 일으켜줄 수 없다.
펑펑 울더라도,
그 아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을
내가 대신할 수는 없다.
그 순간은 마치
예고되지 않은 ‘불확정성’이
눈앞으로 운석처럼 떨어지는 사건이다.
당장은 내가 쉽게 해결해줄 수 있다.
일으켜 세우고, 먼지를 털어주고,
가슴에 안아주면 된다.
그러나 나는 멈춘다.
그 행위는 아이에게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뒤로 미루게 만들고,
결국 이후의 인생에서
더 큰 충격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기다린다.
눈물이 그치고,
아이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올 때까지.
그 시간이 길든 짧든,
나는 그 아이의 고통을
진단하거나 측정하지 않기로 한다.
‘얼마나 아픈지’보다는,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아야 하니까.
물론, 앉아 있는 동안
수없이 많은 감정이 몰려올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다.
그 작고 여린 속살이
흙바닥에 닿는 모습을 본다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 역설을 견디는 것이
내가 아이에게 평생에 걸쳐 보여줄 철학이다.
아이는 언젠가
이 완전해 보였던 알껍질을 깨고
외부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더 이상
‘함께 살았던 집’이라는 말로
관계를 증명하고 싶지 않다.
아이가 다시 찾아오든,
찾아오지 않든
그건 기억의 반복일 뿐이다.
성인이 된 아이와
한두 번쯤은
서툰 유전자를 나눠 가진 맥주 한 캔을 두고
일상의 마찰음을 토론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이건 전통적 가정관의 해체일지도 모른다.
부양의 의무를
애초에 배제하려는 내 방식이
너무 차가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스스로 나오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니다.
순간의 이기와 혼성된 욕망 속에
사전 준비 없이 세상에 등장한 생명이다.
그 아이는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목적 없는 대양 위를 떠도는 배와 같다.
그에게, 그 이후의 삶까지
무게로 짊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고,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살아가면 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는 관계가 되면 된다.
정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가장 깊은 사랑의 형태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