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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Apr 29. 2020

그 유명한 로모

로모 LC-A+ 구매기

음….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번째 필름 카메라 구매기다. 디지털 사진을 놓은 것도 아닌데(오히려 가열차게 찍고 있는데) 필름 사진이 왜 이렇게 재밌고, 필름 카메라가 왜 이렇게 자꾸 갖고 싶은지 모르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구매사용기를 쓰지 못한 필름 카메라가 한 대 더 있고, 구매 후 이상이 발견돼 입원했으나 부품을 구하지 못해 몇 달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필름 카메라도 한 대 더 있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것이 물욕인지 예술욕인지 모르겠다.


LOMO LC-A+


로모가 눈에 들어온 것은 올해 초 필름 카메라를 알아보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각종 중고 카메라들, 보통 작동은 정상이지만 외관으로 봤을 땐 도저히 남은 날을 예상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생명력이 확실한 경우 그 확실함만큼의 가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명’이라는 관점 하에 믿을 수 있는 제품은 당연히 새로 생산된 제품이고, 고가의 전문가 레벨 제품을 제외하면 그 조건에 맞는 유일한 제품이 로모였다. 하지만 그 역시도 3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으로 사양에 비해선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수준이다.


결국 또 답은 중고다. 우리에겐 당근마켓이 있다. 품속에 로모를 지를 수 있는 금액을 품은 채 두 달 가량을 잠복했다. 작정하고 로모만 살핀 건 아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사지 않았으면 끝나지 않았을 것 같아 사실상 잠복한 것이라 결론 내렸다. 세 개의 로모 매물을 넘긴 끝에 이 놈이 나타났다. 사진을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로모 LC-A+. 풀박 세트에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외관.. 몇롤 안 썼다는 판매자의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LOMO LC-A+


고민은 2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최근 산 카메라가 여러대이므로 여자친구에게 사전 통보(라 쓰는 승인 과정)가 필수였다. 매일 카메라를 만지는 나를 '으이그 이 화상아'하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구박하던 그녀도 로모 만큼은 쿨하게 오케이 했다. 이유는... 커버를 닫았을 때 보이는 사람 그림이 너무 귀엽단다. 로모가 사람 그림을 그려줘서 참 다행이다. 그 그림이 없었다면 이 글도 없었지 않을까...


구매 의사를 밝히고 소폭의 네고를 거쳐 11만 원에 거래 확정. 바로 당일 직접 만나 거래했다. 특히나 만족스러웠던 것은 러시아산 렌즈를 사용한 제품이었다는 점. 중국산 렌즈를 사용한 모델이 더 많다고 들었는데 로모의 고향 러시아산 렌즈라니! 마더로씨아!!!!!! 곧바로 코닥 프로이미지(Kodak ProImage 100) 필름을 넣고 3일 만에 한 롤을 찍었다.


마더로씨아!!!!!!!!!!!!!!!!!!!!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월요일 오전에 현상소에 맡긴 필름은 오후에 스캔까지 완료돼 현상소 서버에 올라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접속한 신규 생성 폴더에는 사진이 19장뿐이었다. 왜죠? 36컷짜리 필름인데요….. 화면 상단에 깜빡이는 빨간 띠…. 클릭하자 현상 담당자의 메시지가 뜬다.


“혹시 너무 어두운 곳에서 촬영하셨는지 아니면 셔터막에 이상이 있는지 정확한 건 모르겠습니다만 검게 찍혀 아무것도 없는 컷이 꽤 있었습니다. 다음 번 촬영 전에 카메라를 한 번 점검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곧바로 현상소로 달려가 필름을 받았다. 아무것도 없는 투명한 칸이 왜 그리 많은지…. 이미 당근마켓 중고거래로 한 번 실패를 맛봤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카메라가 문제인 건지, 필름 카메라를 안 만드는 카메라 제조사들이 문제인 건지, 당근마켓이 문제인 건지, 질러대는 내가 문제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카메라에 들어있는 코닥 엑타는 어쩌지… 16000원짜리 필름인데… 17컷이나 찍었는데 그것도 많이 날아갔겠네…


허탈한 마음으로 필름과 사진을 한참 번갈아 보다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 왜 낮에 찍은 하늘 사진이 하나도 없지?’ 생각의 꼬리를 잡고 기억을 되짚어보니 로모의 비네팅 맛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일부러 하늘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 여러 컷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모두 날아갔다. 그 이외 날아간 사진들도 모두 해가 쨍쨍한 낮에 외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남은 사진들은 실내, 어둑해지는 저녁 즈음에 찍은 사진들이었다.


어두우면 셔터가 안 열리는 경우는 자주 봤는데 밝을 때 안 찍히는 건 무슨 경우?


일단 찍던 필름을 감아 꺼내고, 뒷뚜껑을 연 상태로 테스트를 했다. 모니터 앞 통과, 형광등 통과… 아냐 빛이 약해….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 기능을 켰다. 노출계를 바짝 대고 셔터를 눌렀는데! 스프링 튕기는 소리는 나지만 셔터막이 열리지 않는다. 아주 짧게라도, 바늘구멍만 한 크기로라도 반대편 빛이 보여야 하는데 말이다. 로모 수리로 잘 알려진 카메라 수리점에 전화를 했다. 렌즈가 러시아 렌즈인지, 시리얼 번호 앞 두 자리가 뭔지 묻는다. 깔끔한 외관 때문에 몰랐던 사실, 내 로모는 08년 생산 제품이다. 아저씨는 말했다. 러시아 렌즈를 사용하던 시기에 생산된 로모들에서 매우 흔하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오버홀을 하면 대부분 쉽게 고칠 수 있단다. 수리비는 6만 원. 다행히 판매자와 얘기가 잘 돼서 수리비 6만 원 중 일부인 4만 원을 환불받기로 했다. (앞으로 중고 로모를 구매할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 체크하시길 바란다.)


월요일에 맡긴 카메라를 금요일에 받았다. 수리점 아저씨는 오버홀을 하며 불안정했던 노출도 안정적으로 잡았다고 했다. 꺼냈던 필름을 다시 넣고 가방을 암백처럼 활용해 17컷을 넘기고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필름은 현상하기 전엔 알 수 없으니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비정상의 정상화... 어디부터 정상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화요일에 다시 현상소에 필름을 맡겼다. 월요일에 연차를 냈던 터라 정신없이 일을 하는 사이 스캔본이 업로드됐다는 메시지가 왔다. 등록된 사진은 27장. 필름을 받아 보니 제대로 고쳐졌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36컷 중 빈 9컷은 모두 고치기 전에 찍은 부분이었고, 고친 이후는 빈칸이 하나도 없었다. 참으로 어렵게 정상이 된 LC-A+…. 이제야 결과물에 집중할 수 있었다.


LOMO LC-A+ with Kodak ProImage 100


확실히 로모는 렌즈가 좋은 카메라는 아니다. 누가 그랬다. 이런 카메라를 스파이들에게 지급했기 때문에 소련이 망한 것 같다고. 왜곡이 기가 막힌다. 좌우상하로 균등하게 왜곡되는 게 아니라 비대칭 왜곡이다. 심지어 촬영거리(초점)에 따라 왜곡이 심하게 나타나는 방향도 바뀌는 듯하다. 불규칙적으로 회오리 보케가 나타나고, 최소 초점 거리도 기재된 숫자(0.8m)보다 약간 더 먼 느낌이다. 뷰파인더는 정말 내 콧구멍만 하다. 비네팅은 명성에 비해 심하지 않았으나 그게 로모의 재미라서 기대했기에 오히려 김이 샌다.


하지만 압도적인 장점이 있다. 점퍼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컴팩트하다. 나름 조리개가 F2.8이다. 32mm의 화각은 숫자로 보면 애매하지만 사용해보니 길거리 스냅에 적절하다. 단렌즈와 존 포커스 결합으로 촬영 자유도가 상당히 제한되니 무엇을 담을지 더 고민하게 된다. 노출이 롱셔터로 계산되면 경고등이 들어와 더 단단히 고정할 방법을 찾던지 깔끔하게 포기할지 결정할 수 있다. ‘일단 찍고 보자’는 없다. 더 많이 찍어봐야 정확히 알겠으나 확실히 콘트라스트가 강한 느낌이다. 부드러운 톤으로 찍히는 PEN FT와 차별화된다.


LOMO LC-A+ with Kodak ProImage 100


결론은 이렇다. 로모 LC-A+는 좋은 카메라는 아니지만 재밌는 카메라고, 13만 원 정도 투자할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앞으로 PEN FT와 함께 내 필름 바디 라인업 원투펀치를 담당하게 될 듯하다. 다만 좋은 필름은 굳이 쓸 필요가 없겠다. 저렴한 필름으로 한 롤 더 찍는 게 낫다. 해상력이 너무 평범해서 엑타 같은 필름을 넣는 건 자연산 대광어 회 떠와서 매운탕 국물에 익혀먹는 꼴이다.


좌 Kodak ProImage 100, 우 Kodak Ektar 100 / 같은 날이어서 더 확실히 비교되는 두 필름의 색감. 근데 비대칭 왜곡 어쩔...
LOMO LC-A+ with Kodak Ektar 100 - 찍을 때도 그랬지만 사진으로 보니 더 가슴이 저릿하다...
LOMO LC-A+ with Kodak Ektar 100 - 이 사진 찍은 날은 4월 18일. 세월호 참사 6주기 이틀 후였다.
LOMO LC-A+ with Kodak Ektar 100
LOMO LC-A+ with Kodak Ektar 100
LOMO LC-A+ with Kodak Ektar 100
LOMO LC-A+ with Kodak Ektar 100 / 여윽시 고양이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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