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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May 19. 2020

저는 사진을 찍습니다

앞으로도 찍을 겁니다

얼마 전 업무적인 계기로 타인이 쓴 글을 보게 되었다. 사진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그 글을 쓴 사람은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일종의 ‘현실도피’였지만 여러 사진에 도전하는 동안 수없이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그 과정 속에서 인생은 원래 실패와 성공의 반복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글은 지금까지 읽었던 사진에 대한 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진심이 담겨있는 글이었다. 그때부터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럼 나는 사진을 왜 찍을까? 사진이라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그냥 재밌어서 찍는 것인가? 이제부턴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Nikon D5600 + Nikkor 50mm F1.8
Nikon D5600 + SIGMA 24-70mm F2.8 DG OS HSM | Art


청소년 시절부터 사진에 약간은 흥미가 있었던 듯하다. 주변에 사진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배울 기회도 없었기에 그저 필름 카메라 하나를 사서 써봤을 뿐이고, 신문이나 온라인 뉴스에 실리는 강렬한 사진들을 보며 감탄할 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부터 기회가 왔다. 과에 보도사진학회가 있었고 너무나 당연하게 가입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사진을 무수히 찍어댔다. 우리 과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진 찍는 사람, 사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이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세상에는 내가 몰랐던 굉장히 많은 것들이 있고, 그것이 굉장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 사실 졸업 이후에는 사진을 찍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선 조금 놓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최근 들어 사진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재미를 다시 느끼고 있다. 너무 재미있어서 ‘도대체 왜  이 재미를 잊고 살았지’싶을 정도다


Nikon Z6 + SIGMA 50mm F1.4 DG HSM | Art


본디 취미는 재미있으려고 하는 것이고, 한 번 재미를 느끼면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이유는 딱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계속 즐기게 된다. 때문에 “왜 사진을 찍는가?”와 같은 질문은 나에게 크게 의미가 없다. 나에게 적절한 질문은 이거다. “사진을 찍으면서 무엇을 얻었는가?”


사실 나는 상당히 편협한 사람이었다. 고집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나만의 가치관이 매우 뚜렷하다. 내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평가절하하는 언행을 자주 했다. 심지어 사진에 있어서도 그랬다. 대학에서 사진을 배우면서 ‘흑백 사진은 컬러 사진보다 위대하며, 필름과 디지털 모두 렌즈를 교환할 수 없는 카메라는 그저 막 찍는 똑딱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SIGMA fp + SIGMA 35mm F1.2 DG DN
SIGMA fp + SIGMA 45mm F2.8 DG DN | Contemporary / 컬러모드에 대한 반감을 날려준 fp의 틸앤오렌지 모드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며 어느 정도 성숙한 사람이 되면서 나도 많이 변하긴 했다. 여전히 고집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나만의 가치관이 뚜렷하지만 내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것도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무엇이 영향을 미쳤을까? 전적으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진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사진은 순간을, 부분을 담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좋은 사진은 결국 그 순간과 부분을 담아내기 위해 전체를 이해하고 넓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선별하는 과정엔 모두 각자의 개성이 반영된다. 누군가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 나와 다른 그 사람만의 스타일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람이 어떤 것에 주목하는지 알 수 있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을 가르는 절대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마다 그 변주의 폭은 한없이 넓다.


SONY A7R2 + SIGMA 35mm F1.2 DG DN | Art


사진을 더욱 많이 찍고 사진을 다루는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만의 가치관과 기준을 고수하는 성향은 더욱 약해지고 있고, 더욱 약해질 필요성을 느낀다. 긴 사진 공백기 이후 다시 사진을 다루게 되면서 요즘 사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들이 모조리 부서지고 있다. 한동안 사진의 세계를 잊고 살았던 것이 오히려 원점에서 다시 살펴보는데 도움이 됐다.


풀프레임 센서 카메라가 크롭 센서 카메라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월한 부분들이 있을 뿐이다. 흑백 필름과 컬러 필름 중 더 수준 높은 사진은 없다. 컬러 필름만이 가진 느낌이 있다. 컴팩트 카메라는 막 찍는 수준 낮은 똑딱이 카메라가 아니라 쉽게 찍을 수 있는 형태의 도구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 건 결국 사람이다. 미러리스 카메라는 이상한 변종이 아니라 DSLR 카메라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 준 상호보완적 관계다. 오래된 카메라가 오히려 지금의 카메라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SIGMA fp + 45mm F2.8 DG DN | Contemprary
SIGMA fp + 105mm F1.4 DG HSM | Art
Olympus PEN FT + Fujifilm Superia400
SIGMA sd Quattro H + SIGMA 24-35mm F2 DG HSM | Art


정방형 사진을 인스타그램 비율이라고 폄하했으나 35mm 필름 등장 이전엔 정방형이 표준 비율이었다. 꽃 사진이 좋아지는 이유는 마음이 나이 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아름답고 자연스럽고 선명한 색을 가진 피사체가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핸드폰 카메라가 소화 못하는 영역도 있지만 카메라가 소화 못하는 영역도 있다. 그저 카메라로 찍은 좋은 사진을 큰 화면으로 볼 때 느끼는 감정과 소소하게 매일 즐기는 핸드폰 사진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서로 다른 종류일 뿐이다.


이 많은 것이 내가 사진을 다시 즐기기 시작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배우고 느낀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비단 사진이라는 취미를 즐길 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알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진다. 꼰대는 닫혀 있는 이가 아니라 배움과 열린 마음을 통해 생각의 넓이를 넓히려는 노력과 의지가 없는 이다. 사진은 나에게 세상의 기준은 너무나도 다양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줌으로써 내가 꼰대가 되지 않게 도와주는 버팀목과 같다.


SIGMA fp + 45mm F2.8 DG DN | Contemprary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사진을 계속 찍을 요량이다. 이 취미만큼은 카메라를 들 힘이 없을 때까지 하고 싶다. 내가 영원히 꼰대가 되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편협해지고 있음을 잊고 있을 때, 손톱만 한 뷰파인더가 더 넓게 보아야 함을 상기시켜주는 역설을 행하면, 꼰대로 가던 길에서 최소한 멈칫거리기라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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