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이가 있다. 알게된 지는 오래됐는데 접점이 없어 한참 뒤에나 말을 제대로 섞는 사이. 그 상대가 쿵짝이 너무 잘 맞는 걸 알게돼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가깝게 지내지 못한 그 시간이 안타까워지는 그런 사이. NIKON TW ZOOM 105가 나에겐 그런 사이가 됐다.
올림푸스 PEN FT 사용기가 담긴 글에 카메오처럼 등장했던 NIKON TW ZOOM 105. 지난 2월 당근마켓에서 어느 여자분에게 5만원에 샀다. 그 글을 쓰는 당시에는 몰랐는데, 예상치 못한 육중한 바디 때문에 한 달 넘게 미뤄뒀다 첫 필름을 넣었을 때 알게됐다. 고장난 카메라를 샀다는 것을. 새 필름을 넣으면 카메라가 알아서 적당히 필름을 당겨 촬영 가능한 컷으로 끌어와야 하는데 이송장치가 필름을 살짝 물기만 하고 옮기지 못해 액정에는 계속 E(empty)가 표시됐다. 하아... 이제 중고 필카는 고쳐써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로모도 고쳐 쓰고 이 놈도 고쳐 쓰고...
이렇게만 보면 컴팩트해 보일 수 있다. 나도 당근할 때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 인근 카메라 수리점(삼성사)에 수리를 맡겼다. 예상 수리비는 8만원. 5만원에 당근한 카메라를 8만원 주고 고치니 13만원에 카메라를 산 셈이다. 인터넷 중고 카메라샵에서 정상 작동 확인해서 파는 가격과 거의 비슷하다. 싸게 샀다고 좋아했는데 결국 줄 돈 다 주고 샀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치밀었으나, 한 달 넘게 지나서 판매자에게 고장났다고 말하는 것은 진상 중의 상진상이기에 버리던지 고쳐 쓰던지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필카 지름신이 강림한 시점이었기에 당연히 선택은 수리.
제대로 만나기까지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수리 접수를 하며 '흔한 기종이 아니라서 부품 수급에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다'는 수리점 사장님의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그게 6개월 가까이 될줄은 몰랐다. 국내에서 부품을 구하다 구하다 못 구한 사장님이 결국 일본에서 고장난 동일 모델 한 대를 직구해서 부품을 조달하셨다고 한다. 양심상 나는 삼성사 사장님에게 이 카메라가 또 고장나면 꼭 삼성사로 오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NIKON TW ZOOM 105의 디테일
NIKON TW ZOOM 105의 디테일
필름 카메라가 멸종 위기임을 실감하며 받아든 TW ZOOM 105. 수리 맡긴 동안 몇 차례 구글링으로 이 카메라가 플래그십 레벨의 컴팩트 카메라라는 것을 알게됐다. 니콘 공식 홈페이지에 과거 제품에 대한 간단한 정보가 있는데 첫 줄이 'Nikon's Top-of-the-line Zoom AF Compact'였다. 그런데 이제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됐는데도, 어쩐지 정이 붙지는 않는다. 일명 '코끼리'라고 부를만한, 컴팩트 카메라라는 분류가 어쩐지 스키니진을 입은 마동석같이 느껴지는 사이즈는 애정을 주기 어렵다.
NIKON TW ZOOM 105와 OLYMPUS MJU3 120의 비교. 진짜컴팩트와 가짜컴팩트
그래도 총액 13만원을 투자한 카메라니 일단 한 번 써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첫 필름은 코닥 울트라맥스 400(Kodak Ultramax 400). 경험상 줌 기능이 있는 컴팩트 필름 카메라는 ISO 200 이상이 답이다. 최대 망원에서 조리개가 F1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도 105mm에선 F9.9였다. 점심 시간에 옥상에서 밥 먹으면서 찍고, 밥 먹고 산책하며 찍고, 주말에 산책하며 찍고, 데이트 하면서도 찍고. 36컷 필름이 21장 찍고 감겨버리는 해프닝을 겪었지만 다시 찍으니 문제 없었다.
NIKON TW ZOOM 105 + Kodak Ultramax 400
첫 필름을 현상 + 스캔하고 나서 결과물을 받아봤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디지털 사진인가 싶을 정도의 선명한 이미지, 깨끗한 색 표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욱 감탄했던 것은 최대 망원에서의 화질이었다. 올림푸스 뮤3 120을 쓸 때 최대 망원에선 콘트라스트와 선예도가 모두 무너지는 결과물이 나왔었다. 결과물의 화질로 대충 줌을 얼마나 많이 넣고 찍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난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마치 최근 출시된 디지털 줌렌즈처럼 줌 전구간에서 균일하게 만족스런 화질이 나왔다.
NIKON TW ZOOM 105 + Kodak Ultramax 400
필름이 ISO 400이라 맑은 날은 카메라가 조리개를 조이고 찍으니 화질이 좋은가 싶어 ISO 160인 코닥 포트라(Kodak Portra)로도 촬영해봤다. 배신은 없었다. 첫 롤에서 느꼈던 퀄리티가 포트라의 부드러운 색감으로 그대로 옮겨갔다. '과연 플래그십은 플래그십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NIKON TW ZOOM 105 + Kodak Portra 160
NIKON TW ZOOM 105 + Kodak Portra 160
물론 이 카메라가 가진 플래그십 레벨의 기능이 화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유용한 기능은 노출 보정 기능. 디지털 카메라처럼 쉽고 빠르게 조작하긴 어렵지만 셔터와 조리개를 직접 선택할 수 없는 컴팩트 필름 카메라에서 노출 보정 기능이 갖는 가치는 대단히 높다. 덕분에 하늘 사진을 마음 놓고 찍을 수 있다. 반셔터를 잡았을 때 초점이 맞은 거리를 LCD로 표시(0.1m 단위)해주는 기능은뷰퍼인더를 보지 못하고 찍을때 영 엉뚱한 곳에 초점이 맞고 있지 않은지 확인할 수 있다.
NIKON TW ZOOM 105 + Kodak Ultramax 400
신기한 기능으로는 촬영 중 필름을 교체하며 사용할 수 있는 '필름 인터체인지 시스템'이 있다. ISO가 서로 다른 2개의 필름을 바꿔가며 찍을 수 있다. ISO에 맞춰 필름 컷 넘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인물 촬영시 피사체의 크기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은 더 신기하다. 바스트샷으로 설정하면 카메라가 알아서 줌을 넣거나 빼 적당한 사이즈로 맞춘다. 이는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인물 연사를 위해 있는 기능인데, 원리가 궁금할 정도로 재밌는 기능이다.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당시로선 '좋은 카메라'를 가르는 기준이었던 월드타임 데이터백도 있고, 써볼 엄두가 안날 정도로 조작법이 복잡하지만 수동 초점 조절(거리 기준 조절 방식으로 10cm 단위의 목측식 초점 개념)까지 가능하다.
필름 두 롤을 TW ZOOM 105로 촬영하며 그 어떤 컴팩트 카메라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만족도를 느꼈다. 큰 덩치 때문에 멸시하고 괄시했던, 하마터면 수리 맡겨놨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고치기로 마음먹어서, 고쳐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또 고장나면 고치러 가겠다는 삼성사 아저씨와의 약속은 말할 땐 빈말 60%였지만 진심 100%가 됐다.
NIKON TW ZOOM 105 + Kodak Ultramax 400
그렇게 다시금 되새기는 카메라 명언... 카메라나 렌즈는 크면 클수록 좋다.... 물론 다양한 소프트웨어 기술로 광학 설계의 부담을 덜어 크기=성능 공식의 한계를 극복해나가고 있지만 최소한 오래된 제품에서만큼은 절대적 진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어느 브랜드 어느 제품이건 '플래그십'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제품은 절대 무시해선 안된다. 컴팩트 카메라를 '작고 편리한 카메라'의 개념이 아닌 '렌즈 일체형 카메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렌즈교환식 버금가는 화질을 즐길 수 있는 카메라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