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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Dec 12. 2020

열정의 총량

-정신에도 내구성이 있을까?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으로 하면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으랴. 너무 꼰대스러운 말이긴 한데 아예 틀린 말로 치부할 수는 없다.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집중을 안 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정신을 한 곳이 쏟으면 그 일이 잘될 확률도 어느 정도 높아지는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근데 우리가 아예 생각하지 못하거나, 생각하고도 자주 잊어버리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그 정신이라는 건 어떤 일이든 될 때까지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은 모두 비슷한 정도로 지니고 있는 것일까? 즉, “집중력이나 열정 같은 정신에도 총량이나 내구성이 있는가?”가 내 질문이다.


SIGMA fp + C 45mm F2.8 DG DN


2010년대 중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왕으로 군림했던 웨인 루니는 갑작스러운 경기력 저하를 겪고 있었다. 축구선수로서 신체 능력과 경험이 조화를 이루며 기량이 절정에 달해야 할 서른 근처의 나이를 감안하면 당시 그 천재의 흐려지는 존재감은 상식을 역행하는 현상이었다. 기자로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나 막연한 가설을 기사에 쓸 수 없었지만 익명성이 보장된 커뮤니티에서는 네티즌으로서 어떤 의견이든 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자주 드나들던 커뮤니티에서 이런 의견을 냈었다. ‘루니의 정신적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다.’


루니는 그 당시 신체적으로 저하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부상이 더러 있기는 했으나 루니는 원래부터 호날두 같은 철강왕은 아니었다. 피치 위에서 그는 여전히 빠르고 파워풀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누구보다도 지능적이고 번뜩이는 플레이로 승부를 결정짓고 모두가 지친 순간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던 무형적 차이가 사라졌었다.


Sony a7M3 + C 100-400mm F5-6.3 DG DN OS / SIGMA fp + A 24-70mm F2.8 DG DN


그 현상의 원인으로 나는 남들보다 몇 년은 빨랐던 데뷔를 지목했다. 데뷔도 그냥 데뷔가 아니라 만 17세이던 2002년부터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2015-2016 시즌 당시 프로 데뷔 이후 14년째 유럽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었다. 잉글랜드 대표로서 각종 국제대회를 오가며 A매치 100경기 이상을 뛴 건 덤이다. 보통 선수들 같으면 서른 중반이나 돼야 가졌을, 어떤 선수들은 은퇴할 때까지도 갖지 못하는 출전 기록을 이미 만 29세에 가졌다.


야구에서는 간혹 투수의 선수 생명을 그 선수가 데뷔 이후 던진 투구 수를 기준으로 예측하고, 실제 이를 선수의 가치 평가에 반영하는 경우가 있다. 신체가 소모된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기 때문에 몸 관리나 타고난 신체능력 등 개인차를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참고할만한 데이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생각은 여기서 시작했다. 정신적 능력도 어쩌면 신체능력처럼 평생 쓸 수 있는 총량이 있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천재적이라고 해서 그 총량도 무조건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루니는 축구 천재였지만 정신력 총량은 평범해서 20대 초반에 데뷔한 선수가 33~34세에 겪어야 할 현상을 일찍 데뷔한만큼 빨리 겪게 된 건 아닐까싶은 의심이 들었다.


SIGMA fp + A 35mm F1.2 DG DN


이 가설을 채택하면 사람들이 가진 정신력 내구성 타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육상 스프린터처럼 폭발적이지만 단시간만 그 폭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마라톤 선수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이어갈 수 있는 사람, 천재성을 갖췄지만 쉽게 다쳐 제 능력을 잘 끌어내지 못하는 사람, 내구성은 좋지만 그거 빼곤 뛰어난 게 없는 사람, 내구성도 능력도 평균보다 떨어지는 사람, 모든 정신적 능력이 다 우월한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요즘 나의 정신력 내구성이 검증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서 축구 기자로 3년 5개월 보낸 후 퇴사, 홍보대행사에서 현대판 노예로 3년간 고객사 주인님들을 섬긴 후 정신과 다니며 퇴사, 수입사 마케팅팀에서 2년을 채워가고 있는 시점에 또다시 떨어지는 텐션. 앞선 3년 5개월과 3년이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살며 버티고 버틴 기록이라는 걸 생각할 때 텐션이 떨어진 시점은 결국 2년 전후로 비슷하다.


SIGMA fp + C 65mm F2 DG DN


떨어진 텐션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이미 뇌가 처지고 의욕과 적극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게 두어 달 됐다. 내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자꾸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퇴근하고 나면 머리 쓰는 행위를 거의 하지 않으려 한다. 진지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자꾸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찾고 반쯤 멍한 상태로 핸드폰 게임만 하는 날이 수두룩하다. 마지막 브런치 글은 두 달 전이었고 바빠서 못쓴 게 아니었다. 쓸 글 리스트 늘어나면서 쓰는 글은 없었다.


심지어 집 청소도 점점 소홀해져 가끔 퇴근 후 집에 들어올 때, 엉망인 집을 마주하면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일도 없는데 화가 나고,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감정이 평소보다 더 격하게 차오른다. 회사에서는 어렵게 감추고 있지만 한두 명은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때 쓰는 단어들이 점점 더 직설적이고 거칠어지고 있다.


SIGMA dp1 Quattro


내가 믿는 가설이 나를 두렵게 만든다. 내 가설이 맞고, 내가 연속적으로 의욕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이 2년 전후라면 이제부터 직장에서 보낼 시간들은 고통의 시간들일 것이고, 또다시 한계점에 다다라 대책 없는 퇴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건 아닐지. 이런 걱정 탓에 한동안 늘어지는 나를 바짝 당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 혹시라도 이런 방치가 비상 충전처럼, 멈춰야 하는 시점을 늦춰주지 않을까 싶어서.


열정으로 하는 일이라 돈 짜게 주는 걸 열정페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다른 의미에서 열정페이로 일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통장에서 돈 빼 쓰듯 우리가 가진 열정을 지불해가면서 일하고, 그 총량이 떨어지면 스러지는 열정페이. 내 정신력 통장 잔고가 그간 좀 불었어야 할 텐데 스위스 비밀 계좌 뺨치는 보안으로 잔고를 알 수 없으니 그저 인출 안될 때까지 버텨보는 수밖에.


SIGMA fp + C 45mm F2.8 DG 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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