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준으로 다시 한번 떠들썩하다. 최근 유승준이 공개한 동영상은 어떻게든 비자를 받고자 하는 의지라도 있던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내지르는, 멘붕 상태로 보였다. 그는 분노를 표현함과 동시에 근거 없는 주장도 했으며, ‘그러는 너네는 얼마나 깨끗한데’ 식의 발언으로 그가 논리력을 상실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부제에서 범법자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정확히 말하면 범법자는 아니다. 편법은 위법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범법자라면 그는 비자 발급 신청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들어오는 순간 구속이니까.
물론 그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해서도 안 된다. 사실 그가 대중을 향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가 자신의 입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침묵을 유지했더라도 입대가 필요한 시점에 가까워올 때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선택한 것은 엄연히 병역 기피 행위다. 법적으로는 기피와 면탈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그 목적성은 완벽히 일치한다. 이중국적자로서 한국에서 내국인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활발한 경제활동을 했으면서 의무가 다가오자 회피책을 선택한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는 상세히 따져볼 가치조차 없다. 그래서 그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개인적으로는 대중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정도에 딱히 공감하진 못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일지 모르나 평범한 군필자임에도 불구하고 군 복무를 한 것이 나에겐 그렇게 억울한 일도 아니었으며 타인이 군대를 다녀왔는지 아닌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는 편인지라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잘 나가는 연예인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내 알 바 아니다. 모병제를 지지하는 이유도 징병제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징벌적 존재여서가 아니다. 한창 성인으로서 가치관을 정립해가는 시기를 군에서 2년을 보낸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가 형성하는 비논리적 조직 문화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징병제 국가이고 나는 법을 따르는 사람이므로 모병제 지지가 징병을 거부한 이에 대해 면죄부를 줄 이유가 되진 못한다.
이 글을 계속 읽을 의향이 있는 이라면 지금쯤 슬슬 궁금해질 것이다. 왜 글 제목에 ‘피해자’와 같이 유승준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들어갔는지.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 역시도 유승준이 잘못을 했다는 것에 100% 동의하지만 입국 불허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정확히는 반대를 넘어 비난하고 싶다. 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형평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유승준처럼 입대에 임박한 이가 출국 후 외국 국적을 획득, 병역을 회피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고, 그중 지금까지 비자 발급이 불허되고 있는 있는 이는 유승준 한 명뿐임을. 일부에선 신청한 비자의 타입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일면은 맞지만 본질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단순 여행비자로 들어온다고 해도 어차피 방문만으로 화제가 될 인물이다. 경제활동 여부는 그 파장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가 입국 금지되는 이유는 결국 ‘유명해서’다. 유명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고, 유명하면 문제가 된다는 법에도 없는 근거를 “국민의 공분”이라는 단어를 빌어 고집하고 있는 게 병무청과 외교부다.
병역의무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행위가 금지된 것이 유명인뿐인가?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유승준의 입국이 금지된 지가 벌써 17년이다. 국회는, 병무청은, 외교부는 17년간이나 같은 방식으로 병역을 회피한 수많은 이들 중 유승준이 ‘특별 사례’가 되도록 방치했다. 그들에겐 유승준이 ‘차별’을 운운할 근거를 차단할 차고 넘치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유승준과 같은 사례에 똑같은 징벌적 조치를 적용할 근거를 마련하는 법안은 이제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저는 유승준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지 않다. 스티브 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스티브 유는 한국 사람이 아니고 미국 사람이다.” 모종화 병무청장이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이다. 질의한 국회의원이 유승준의 입국 금지에 대해 묻자 기다렸다는 듯 당당한 말투로 이름을 직접 정정했다. 통쾌하다는 것이 대다수의 반응이었지만 나는 국가의 녹을 먹는 행정조직의 수장으로서 매우 저급한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스티븐 유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대중들이 유승준을 조롱할 때 쓰는 용어라고 봐야 한다. 병무청장은 대중영합적 발언을 통해 공개적 조롱을 시전한 것이다.
17년간 그렇게 그를 특별 대우하고 공개석상에서도 친히 미국 이름까지 불러준 일련의 행위들은 국민적 관심이 몰리는 사안에 대한 일차원적 대응이며, 그저 유명인에 ‘괘씸죄’를 적용해 본보기 삼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나온 개인에 대한 국가적 폭력이다. ‘유승준 사태’가 발생했을 때부터 허점을 수정하고 균형을 맞춰야 할 의무가 있었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모두 무책임과 불성실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을 드나드는 것은 물론 사회를 버젓이 누비고 있는 병역 기피자들이 너무나 많음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유승준의 행위가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사회 지도부 자녀나 부유한 자들의 빈번한 병역 회피가 '스티븐 유'의 존재보다 사회에 덜 해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려 17년이다. 그 기간 보수와 진보가 모두 정권을 잡았다. 기회는 모두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안일했던 과거를 지금도 어느 한 사람에 대한 고집스러운 심판으로 가리고 있다. 병무청장은 그를 조롱할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허술한 시스템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하고 제2의 유승준 탄생을 방지할 방안 마련을 약속했어야 했다. 병역의 신성한 가치라는 두루뭉술하고 관념적인 수사로 뭉갤 일이 아니다.
그래서 유승준은 죄인이지만 피해자다. 그리고 그의 입국은 허가돼야 한다. 당연히 그러면 입국을 허가한 당국에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 비난, 받아야 한다. 그 사나운 비난을 받으며 그에게 불평등한 법 적용을 했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사회 전체에 공평을 실천해나갈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마음 같아선 유승준 사태 이후 여야 역대 당대표들과 병무청장들, 외교부 장관들 일렬로 쭉 세워서 대국민 사죄시키고 싶은 마음이다. 유승준이 계속 언론에 회자되도록 만든 자들이 바로 저들이다.
그러면 유승준의 죄는 누가 심판해야 할까? 누구긴 누군가. 바로 우리다. 대중이 심판해야 한다. 유승준이 받아야 할 벌은 입국 금지가 아니라 대중의 철저한 무관심이다. 연예인에게 그보다 큰 벌은 없다. 난 유승준이 입국해도 그가 뭘 하는지에 관심 갖지 않을 자신이 있다. 유승준이 입국해서 예전처럼 활동하는 상황을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이 개돼지임을 인정하는 꼴이다. 대중이 그에 대한 분노를 유지한다면 그 어느 방송도 영화도 그를 섭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한국땅에 굳이 와야 할 가치를 못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게 진짜 추방이다. 만약 우리가 고작 그 조차도 실천 못할 수준 낮은 국민성을 가졌다면 억울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을 바랄 순 없다.
*평소 쓰던 글들과 주제가 영 달라 쓸까 말까 고민했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이라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