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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Feb 17. 2020

갑분필 : 올림푸스 PEN FT 구매기

우연히 찾은 보물

갑자기 좋은 필름 카메라가 갖고 싶어졌다. 회사 창고에 박스 채로 쌓여있던 옛날 카메라 더미에서 올림푸스 TRIP 35를 찾아 쓴 게 화근이었다. 나를 사진의 세계로 인도했던, 수동카메라로 필름 사진 찍는 마약 같은 맛을 다시 느끼고 말았다.


필름 카메라가 없는 건 아니었다. 2003년 구매한 올림푸스 뮤Ⅲ 120을 작년 여름 서랍에서 찾았다. 그때 당시 4롤 정도 찍었던 걸로 기억한다. 새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하지만 한 번 써보니 그때 버려둔 이유를 다시 깨달았다. 이것 역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도구는 맞지만, 사진을 찍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카메라라고 말하긴 어렵다. 디지털에서 필름으로의 회귀 같은 현상은 아니지만 즐길 땐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최소 조리개가 F5.6인건 참을 수 있지만 초점이 어디에 맞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전부터 니콘 FM2를 사려고 했다. 니콘 50mm F1.8 렌즈가 있었기에 바디만 사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가격이 너무 올랐다. 50만원 언저리가 평균이다. 2000년대 중반에 그 돈이면 신품급을 살 수 있었다. 바디만 파는 경우도 드물어서 내 렌즈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작은 카메라 맛을 보니 둔기 같은 FM2가 꺼려졌다. 당근마켓에 올라온 22만원 꿀가격 상품도 결국 지나쳤다.


지름의 시작점, 문제의 올림푸스 TRIP 35. 내가 딱 좋아하는 40mm 변태화각
언젠가 결국 살 것 같은 콘탁스 G1 + 플라나 45/2.0 조합.....


그러고는 충무로 일대를 며칠 들쑤시고 다녔다. 올림푸스 TRIP35를 찾았으나 어쩐지 가성비가 떨어져서 포기. 40mm F2.8에 셔터스피드는 1/40과 1/200 프로그램 모드. 20만원 주고 사기엔 뭔가 아쉬운 사양이다. 70만원에 가까운 콘탁스 G1은 RF카메라에 자이스 렌즈까지 가격만큼의 가치는 가지고 있었으나 내 돈이 빠듯했다.


칼 자이스 바리오 조나 T* 코팅의 위엄. 가격은 위험.


같은 팀 주임이 쓰는 콘탁스 tvs가 카메라 가게에서 번뜩 눈에 들어와 바로 지르려 했으나 가격표도 제품도 잘못봤다. 28만원도 아니었고, 카메라가 아닌 가죽 케이스였다…. 제대로 알아봤더니 40만원대. 수동 SLR보다 고장도 잘 나면서 FM2 육박하는 가격에 이것도 포기.


제 카메라 좀 봐주세요. 너무 예쁘지 않나요???


그러다 이걸 만났다. 올림푸스 PEN FT. 출근길에 매일 지나는 카메라 상점 진열대에 놓여있었는데 크기와 상태가 눈길을 확 끌었다. 그날 저녁 당근마켓에서 니콘 컴팩트 카메라 TW ZOOM 105를 5만원에 구매하기로 약속을 잡아놨는데 퇴근길에 다시 마주친 그 카메라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가게에 들어가 자세히 구경해보니 보통 마음이 동하는 게 아니었다. 사이즈가 작아 일체형이라 생각했는데 렌즈 교환식이어서 놀랐다. 심지어 렌즈 조리개값은 F1.8. 뒷판을 열고는 하프카메라여서 또 놀랐다. 렌즈를 분리해보니 미러가 옆으로 움직이는 신기한 구조다. 23만원이라는 가격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크... F1.8입니다.
초점도 셔터스피드도 ASA 설정도 수동으로! 이것이 바로 불편한 갬성!


그날 저녁 예상과는 다르게 FM2만큼 묵직한 크기의 니콘 TW ZOOM 105를 구매했지만, PEN FT는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좋은 핑계가 있었다. 2월은 내 생일이 있는 달이다. 내가 1년 중 유일하게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유효하게 생각하는 타이밍이었고, 결국 다음날 내 지갑이 열렸다.



찍어보니 장점이 많다. 일단 필름 기본 컷수의 두 배를 찍을 수 있고, 판형도 작고 미러도 작다보니 낮은 셔터스피드에서도 흔들림이 적다. 1/30초에서 별 생각없이 셔터를 눌러도 문제없다. 스캔하면 두 컷이 붙어 나오는데 두 사진이 어우러져 의도치 않은 갬성이 완성되기도 한다. 올드렌즈 특유의 쫀쫀하지 않은 화질과 덜 깔끔한 배경흐림도 필름 갬성을 제대로 살린다.


카메라 노출계는 한 롤 찍어본 결과 정확하진 않으나 오락가락하진 않았다. 일관되게 적정 노출의 2스탑 오버로 측정돼서 내가 2스탑 어둡게 찍으면 된다. 심지어 혹시나 싶어 사용해본 스마트폰 무료 노출계 어플이 기대 이상으로 정확해서 노출계가 고장 나도 걱정 없다. 스캔한 JPG도 포토샵으로 보정해보니 위아래로 1.5스탑 정도는 커버 가능해서 적정노출로만 찍어도 버리는 사진은 거의 없을 듯하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디지털 카메라
매일 보는 성수동 풍경. 이렇게 스토리 같은 구성을 고려하고 찍을 수 있다.
짜장면집 갬성


이 정도 마음에 드는 물건 구매는 모든 소비를 통틀어도 드물다. 23만원을 썼지만 돈을 오히려 번 기분이다. 그 기분으로 렌즈 보호용 필터와 렌즈캡도 샀다. 앞으로 필름 사진도 열심히 찍게 될 것 같다. 결국 또 돈 쓰게 될 거라는 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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