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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Jan 29. 2020

내 취미는 결국 일이 된다

시작할 땐 좋아서지만 나중엔 아니란다


취미. 趣味. 국어사전은 취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즐겨하는 일’. 그렇다. 특별한 목적 없이 좋아서 즐겨하는 것이며 죽자 사자 달려들어 전문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좋아하다 보니 전문적인 수준으로 빠져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선택일 뿐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며 멈추고 싶을 땐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취미다.


이거 원래 제 취미였습니다


한동안 덕업일치가 유행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행복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회자됐다. 대부분 순전히 생존수단으로써의 업을 선택한 후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행복을 찾아 ‘덕질’을 일로 전환한 사람들이고, 일이기 때문에 분명 어렵지만 행복하다고 말한다.


사실 취미가 일이 되는 경우는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ROTC 전역 후 대기업 손해보험사에 줄곧 다니는 내 친구의 취미가 기업 보험은 아니었고, 어느 공익단체의 홍보담당자로 사는 내 친구의 취미가 교통안전 캠페인 홍보는 아니었다. 경제지 기자로 사는 친구 녀석은 노동 운동을 덕질했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덕질하진 않았다. 어느 패션회사에서 면세점 세일즈 업무를 하는 내 여자친구가 면세점 쇼핑을 즐긴 건 확실하지만 세일즈 덕질은 분명 하지 않았다.


취미로 시작해 일이 됐고 이젠 그냥 일도 취미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한 번도 쉽지 않은 덕업일치가 두 번이나 실현됐다. 한 번은 너무나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번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게 내 강점이 돼서.


난 덕업일치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덕업일치가 꿈이었다. 그런 말이 없었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을 뿐. 축덕으로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을 보낸 나는 일찌감치 축구 기자를 꿈꿨고 그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며 지속적으로 덕질을 했고, 결국 한낱 취미에 그칠 수 있는 그 덕질을 직업으로 승화시켰다. 당시 나는 단 한 번의 입사 원서 제출로 직장을 얻었다. 목표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놀라운 인내 끝에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라고 우쭐대며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할 정도로 한 길만 생각했고 엄청난 위험을 떠안았던 것이다. 한 스텝이라도 삐끗해서 꼬였으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결국 이렇게 쓰러지고 말았다


유럽이 나에게 갖는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한 내 글에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덕업일치가 반드시 취미 그 자체를 마음껏 즐길 수 있음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취미로 하던 무언가를 '바탕으로' 일을 하는 거다. 축구를 보는 게 일이 아니었다. 축구를 보는 것은 그것들을 하기 위한 필수적 행위일 뿐이었고 축구를 보기 전에, 보면서, 보고 난 다음에 해야 할 것들이 일인 것이다. 난 거기서 무너졌다.


그렇게 나는 취미가 일인 삶의 실패를 겪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흔한 회사에서 새로운 시작을 했다. 시키는 대로 하고 애정은 1도 없어도 큰 문제는 없는 홍보대행사로. 왜 그런 회사를 골랐겠나. 취미를 일로 하다 망했으니 일은 일답게 하자며 정반대로 가는 게 지쳐 쓰러져 아메바 수준으로 사고가 퇴화된 아둔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선택 아니겠나.


퇴사 1주일 전. 고작 빵으로 점심 먹는 게 회사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었을 정도로 심각한 정신 상태였다.


나 스스로 평가해도 대행사에서의 삶이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운 건 분명히 있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 남의 회사의 소신을 나에게 투영하는 법을 배운 게 최고의 수확이다. 맞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말할 권리가 있는 기자와는 완전한 반대의 사고방식. 근데 반대로 이런 삶을 받아들이기엔 또 내 자아가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하긴, 거의 30년을 산 후에야 ‘형’이라는 존재가 우리 문화에서 갖는 우월적 지위에 대해 인정을 하기 시작했을 정도니 이 못 말리는 자아가 고객사의 온갖 비합리적 요구와 이를 묵인하는 회사에 행태를 무사히 견딜 리 만무했다. 환승역은 신경정신과, 종착지는 퇴사였다. 


또 한 번의 퇴사 후 나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취미를 일로 하는 것도 실패, 내 기호와 완전 무관한 일다운 일을 하는 것도 실패. 그럼 난 도대체 뭘 할 줄 아는 거지? 그냥 일을 하기 싫은 건가? 아, 그건 누구나 다 그렇구나.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앞으로 해외출장은 없을 줄 알았는데, 생겼다.


나는 지금 세 번째 도전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의도하진 않았다. 50~60곳 정도 원서를 넣은 것 같고, 10곳 정도 면접을 봤다. 그중 한 곳이 나를 택했다. 내가 대학시절부터 축구 다음의 취미로 즐긴 사진. 그 분야의 회사가 나를 선택한 것은 우연은 아닐 테다. 결국 일을 하려면 뭔가 잘 아는 건 있어야 했다. 경력은 나를 비롯해 모두가 가진 것이었지만 취미로 쌓은 경험과 지식은 가산점을 줄 수 있는 무언가였다. 결국 또 취미가 일이 됐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내 새 직장을 알게 되자 "왜 항상 취미로 일을 하냐"라고 신기해하던데 나도 왜 인생이 그 방향으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까진 재밌는 중이다.


역시나 취미가 일이 되는 건 재밌긴 하다. 그 누가 ERP나 도박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싶겠나. 강제로 하더라도 내가 재밌어하는 분야를 공부하는 게 훨씬 낫지. 학습은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속도가 빨라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원래 잘 아는 상태로 일을 시작한 줄 안다. 그냥 덕후짓이 습성이라서요... 거의 1년을 쉰 덕인지 이미 덕업일치에 지친 경험이 있지만 느낌이 나쁘진 않다. 예전엔 취미일 때나 일일 때나 '축구를 본다'라는 행위가 같았기에 일이 아닐 때도 일 같아서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지금은 사진을 찍는 게 일이 아니다 보니 매일 사진과 카메라를 다루면서도 사진을 찍는 것이 싫지 않다. 게다가 질린다 싶을 땐 쿨다운될 때까지 카메라 안 만져도 일하는 데 지장 없다는 게 가장 큰 차이다.


적당한 거리 유지가 중요하다는 식상한 고슴도치 이론을 가끔 떠올리며 양극단이 망했으니 그 중간 어디쯤에서 절묘한 지점을 찾아보자고 노력 중이다. 성공할진 잘 모르겠다. 이건 또 처음 해보는 거라. 인생의 모든 순간은 처음이니까. 근데 이번엔 성공했으면 좋겠다. 쉬는 동안 취미 삼아 배웠던 가죽공예로 클래스 강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나도 ‘이게 내 재능인가’ 싶을 정도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순수한 취미로 남겨뒀으면 하는 게 내 희망사항이다. 인생 굴러가는 그림을 보니 아무래도 취미가 일이 되는 게 내 운명인 것 같은데, 자꾸 그만두면 기존 취미로 일을 하고 새로운 취미를 찾아다니기를 반복하겠지. 결국 즐길 수 있는 취미는 많은데 돈이 없어서 다 못 즐기다 속 터져 화병으로 숨을 거두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것만은 내 순수한 취미로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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