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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Jan 12. 2020

남혐 하는 남자

남자도 여자도 되지 못하는 존재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도발적인 제목으로 네티즌의 클릭을 부르는 법을 제대로 배운 기자 출신 30대 남성의 숙련된 스킬에 넘어간 것이다. 100% 낚시는 아니니 너무 허무해할 필요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혐까지는 아니지만 요즘은 때때로 남자로 태어난 것이 대단히 부끄러운 순간들을 마주한다. 남자로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닌데, 나 역시 남자라는 건 명백한 팩트기 때문에 남자들의 한심한 행태를 목격할 때면 여자로 태어났으면 최소한 부끄러움이 내 몫 아니었을 것 같아 여자들이 부러워진다. 그리곤 이내 여자들이 겪는 고난들이 떠오르면서 그 작은 편의 때문에 여자들을 부러워한 내가 다시 부끄러워진다. 남자로 태어난 것은 나로썬 한 번만 부끄러워도 될 것을 두 번 부끄럽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나름 자랑을 하자면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요즘의 흐름이 생기기 전부터 어느 정도는 남녀평등의 사고를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즈음 알게 된 여자사람친구는 나에게 “너는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여자를 남자와 동등하게 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비친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리고 그 순간 여자들이 남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 그것을 여자들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덤이다.  아주 가끔은 여자친구와 대화하며 내가 여성이 받는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여자친구가 반론을 펼치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얼굴로 태어나기라도 했으면 좀 덜 억울했을 텐데 말이다.

(이 글이 82년생 김지영과 연관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게 중심은 아님에도 82년생 김지영 스틸컷이 계속 나올 예정인 이유는 글만 넣긴 좀 그런데 도저히 이것 말고는 넣을 만한 적절한 사진이 없어서다.)


어쩐지 모르게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환경은 불편했다. 남자들만 모인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 소재, 남자들만의 표현, 남자들만의 사고방식… 남자를 대상으로 한 얘기는 지금도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다. 흑인들끼린 서로를 'ni**a'라고 불러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여자가 소재가 되는 얘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한때는 같은 남자라는 동질감 아래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그런 대화를 거들었던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뚝배기도 완전 빻았었다. 그러나 또래문화에 대한 편승 욕구보다 나에 대한 자각이 앞서기 시작할 때부터 어디서 올라오는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의식적으로 남초 환경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은근히 오해도 많이 받았다. "쟤는 여자 참 좋아해". 해명하자면 여자가 좋았던 게 아니라 남자가 싫었던 거다. 내 학창 시절이 그다지 개념 있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여자가 남자만큼 있거나, 여자가 남자보다 많은 환경에서 남자들끼리 있을 때처럼 행동하는 남자는 흔하지 않았기에 그런 오해를 감수하고도 나는 여자들이 있는 환경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선 “혼자 고상한 척하는 놈들이 뒤에선 더하다”는 더러운 누명을 씌우며 동조를 압박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평범한 남자들보다 더 많이 여자사람친구들을 사귀었다. 연애는 평범한 남자들보다도 못했어도 여자사람친구는 오히려 더 많았다. 지금도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의 수도 남자보단 여자가 더 많다. 이런 시간을 오래 보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체득된 여성적 사고방식도 많아져 사회에 나와서도 다른 남자들보다는 쉽게 여성집단에 융화될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그들에겐 내가 결국 남자기 때문에 존재하는 선이 있음을, 그리고 내가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하는 편이다. 가끔 ‘내가 미쳤지’ 싶은 생각이 떠오르거나 말실수가 나오는 걸 보면 아직 먼 것 같기 때문이다


정작 여자들이 보기엔 나도 저기 앉은 저놈처럼 남자라서 자연스럽게 이득받는 놈일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성향의 사람이 됐을까 가끔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제쯤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얼추 시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그 기반이 형성됐는지는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영 추측이 안됐다.


근데 아주 의외에 순간에 ‘유레카’를 외치게 됐다. 화제이자 논란이었던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였다. 나는 그날 영화관에 있던 다른 커플들과 반대로 여자친구가 건네주는 티슈를 받아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이상하게 김지영이 받은 설움이 내 설움 같아서. 알고 보니 정도만 덜했을 뿐 진짜 내 설움이었다. 대한민국 농촌마을의 50년대생 6남매 장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항상 차기 집안 장남의 ‘뒷전’으로 살았던 기분이 매 순간 대한민국 남자들의 뒷전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여자들의 기분과 똑같았다. 부모님이 대놓고, 의식적으로 나와 형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건 명백하다. 그럼에도 나는 혜택을 받는 데 있어선 언제나 후순위였고, 형이 먼저 나를 괴롭히거나 부당한 대우를 해도 반발하는 순간 난 똑같이 잘못한 게 됐다. 어쩔 땐 내가 더 잘못한 것이 되기도 했다. 친척 어른들의 은근한 차별 대우는 덤이다. (물론 불만은 없다. 형을 우선시했을 뿐, 나한테도 충분히 잘 해주셨으니.)


형이 가끔 하곤 했던 “억울하면 니가 형 하던가”라는 그 말, “억울하면 남자로 태어나던가”라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형이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단지 형이라는 자리는 스스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부여된 우월적 지위이고, 그 우위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탓에 그 지위에 억눌리는 사람의 기분을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누나가 구박을 하고 교육을 해도 장남은 그 기분 모른다. 동생있는 장남은 더더욱 모른다. 남동생 있는 장남은 말해 뭐해.


그때부터 내가 원했던 건 ‘공평함’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혼나고, 구분해야할 논리적인 이유가 없으면 똑같이 대우하고, 논리적인 의견을 낸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는 아주 평범한 공평함. 가족 안에서 형이라는 이길 수 없는 존재를 상대로 얻지 못한 공평함을 가족 밖에서 만큼은 얻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불공평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뒤집을 수 없는 우위가 있다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비합리적인지 아니까. 아래위를 가리지 않고 공평과 합리를 기준으로 태도를 결정했던 나에게 여자와 남자를 똑같이 대한 건 여자여서 대우한 게 아니라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차별할 이유가 없으니 차별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다만 형이 누린 우위와 여성 여권 신장에 반감을 드러내는 남자들 사이에는 '이득과 책임의 교차점' 존재 유무라는 차이가 있다. 형이 가진 권력은 사회인이 된 이후 서로가 독립적인 개인의 삶을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줄어든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한국 사회에서 형이라는, 장남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누린 것에 대한 각종 책임을 앞으로 평생 짊어져야 하는 처지에 접어들었으니 호시절은 다 간 셈이다.


반면 남녀 차별의 문제에서 남자는 이익이 책임으로 돌아오는 반작용을 겪지 않는다. 남자라서 받는 이득이 남자라서 가진 책임에 비해 월등히 크다. 하지만 그 상태가 너무 자연스럽다 보니 누리는 것들은 당연하고 강제로 내려놓게 되는 상황이 오면 인권침해라도 당한 듯 노발대발한다. 남자라서 이득 본 것이 전혀 없단다. 오히려 군대 끌려가고 여자들한테 양보하면서 손해봤단다. 공감 능력이 문제인지 논리적 사고 능력이 문제인지 헷갈리는 이런 사고 방식이 많은 남자들의 머리 속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백두대간에 박은 쇠말뚝처럼 튼튼하게. 심지어 말조심해야 하는 요즘 분위기조차 무슨 족쇄라도 채워진 마냥 억울해한다. 이 사람들아, 말은 원래 조심해야 하는 거에요… 이러니 자기혐오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속에서 자라나는 남성혐오를 억누르기가 어렵다.


더욱 무서운 것은 높아지는 여권 신장 요구에 대응해 이전과 다르게 더 불분명하고 교묘한 형태로 진화하는 차별의 방식, 현실 세계에서 정체성을 숨기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샤이 성차별주의자'들의 증가다.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면 경추가 저릿할만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확신한다.


일 더럽게 꼬여서 10개월 놀았을 때도 다시 정신과 갈 판이었는데 저 심정은 어떤 심정일지 상상도 안된다.


만약 당신이 남자가 평생 여자보다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산다고 생각한다면, 여자들이 편하게 남편이 번 돈으로 먹고 살 거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부들부들 떤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오히려 남자한테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그 해결책을 제시하겠다. 여자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라. 성희롱하지 말고, 여자라고 하대하지 말고, 여자라고 잡일 시키지 말고, 여자라고 능력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 말고, 여자들은 책임감이 없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갈 때 눈치 주지 말고, 임금 차별 하지 말고, 당신도 육아휴직 쓰겠다고 나서고, 그 이후에도 육아를 당연한 책임으로 여기고 기꺼이 함께하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내 여자만 소중하다는 생각 버리고,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라.


그렇게 여자들이 편하게 일하고, 출산 후에도 원하기만 하면 다시 회사를 다닐 수 있게 되고, 가진 능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게 되고, 그 능력을 임금과 승진으로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의 삶은 훨씬 편해질 것이다. 남자에게 사회생활을 몰빵하고 육아를 선택할 때의 안정성과 기대수익이 지금보다 확실히 낮아지므로 당신들이 짊어지고 무겁다며 징징대는 부양의 의무를 여성들이 기꺼이 나눠가지려 할 것이다. 비아냥 같은가? 아니다. 정말 그렇다. 이해가 안된다면… 조심스럽게 지능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여혐은 지능 문제라는 말, 처음 들었을 땐 비약이다 싶었는데 생각해볼수록 띵언이다.


문제는 육아휴직 쓰겠다고 나서면 짤릴 수도 있는 회사가 여전히 매우 많다는 사실... 여자 욕할 때 연대하지 말고 이럴 때 연대합시다 좀.


이런 생각으로 사는 게 쉽진 않다. 태생적으로 동일한 특성을 가진 존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날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들과 비슷한 생각으로 사니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살겠다. '일부'라고 확답하기 어려운 찌질한 남자들을 대신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 명이라도 계몽할 수 있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과장 좀 보태서 남혐인 지금 내 상태가 진짜 남혐으로 발전하기 전에 희망을 찾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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