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 일주일이 아니라 오늘 하루.

by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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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언제 쓰세요?"

"책 읽고 수업 준비하면 시간이 모자라지 않나요?"


몇 권의 책을 출간하고 틈틈이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두고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조금 바빠 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는 것 같다. 정말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재미있어서인지, 아니면 먹고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습관이 되어서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잘 하고 싶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불안한 느낌이 드는 날도 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노력과 결과가 대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나의 관심이 세상의 관심과 다를 수 있다는 것,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라는 이름이 나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글이 술술 써지지 않을 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하얀 종이와 종일 눈씨름을 하고 있을 때, 일상을 핑계 대면서 자꾸 물러서는 날에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인해 더 많이 답답해했고, 불안해했다. 술 한 잔을 마시면서 행간의 의미를 논하고, 간절한 느낌을 절할 수 없는 상황을 절절하게 나열해봐도 소용없었다. 그때뿐이었다. 다음 날 일어서지 못하는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머나먼 여정이 거창한 맥락 속에서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눈은 멀리, 손은 가까이'라고 했지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손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놓치곤 했다. 그런 경우 책을 더 찾아 읽거나 아니면 아예 책을 읽지 않는 방법, 글을 쓰거나 아예 글을 쓰지 않는 방법,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잠시 다른 일을 하는 방법 등 여러 방법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방법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 일이 시원스럽게 진행되지 않을 때, 큰 돌덩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막힌 느낌일 때, 종이를 펼쳐놓고 그날 해야 할 일을 나열한다. 우선순위나 열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날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의지와 상관없이 적는다. 수업에 필요한 책 읽기, 정해놓은 초고 쓰기, 수업 준비하기, 하다못해 인증서 갱신하기처럼 사소한 것까지 모두 나열한다. 그리고는 의지와 상관없이 눈에 띄는 것부터 하나씩 해치운다.(이럴 때는 정말 해치운다는 표현이 딱이다. 하나를 해결하면 수고료를 받는 사람처럼) 아주 기계적으로, 마치 프로그램이 입력된 로봇처럼. 이럴 때 누가 불러도 모를 정도의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데, 사실 자율성과 의지를 상실한 경우가 많다. 무기력해지는 것이 싫어서, 생각이 비집고 들어와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싫어서, 처음부터 생각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처럼,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소가 얻어맞지 않기 위해 걷는 것처럼 눈앞의 일을 해치워나간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에 생겨났다. 며칠을 그런 식으로 보내다 보면 주저앉아있던 다리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햇빛 쪽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끊겼는지 모르겠지만 속상한 일로 울고 나면 마음이 풀리는 것처럼 의지와 다시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호흡이 몸속으로 흐르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저절로 해결이 된 것인지, 노력의 결과인지 구분이 안 갔다. 또한 원인 규명도 불분명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인지, 재능과 노력의 불협화음인지. 특히 이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태도도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쌓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위기라고 느껴질 때, 나는 자율성과 의지를 상실한 채 로봇처럼 보낸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아주 완벽한 날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나름 유효했음을 인정한다.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며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흐릿하게 보일 때도 많고, 잘 보이지 않아서 의문이 생겨날 때도 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 날도 있지만, 불쑥 불쑥 불청객처럼 찾아드는 사건이나 감정, 상황이나 생각으로 인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최대한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봐도 좋을 것 같다. 일 년이 아니라 한 달,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 일주일이 아니라 오늘 하루. 그렇게 최대한 가까이 당겨놓고 하나씩 하나씩 해치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이 이동하는 경험을 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일 년이 아니라 삶 전체로 말이다. 아주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효과를 얻을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 비춰봐서는 그랬던 것 같다.


-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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