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건네는 말
"관습에 의해 달고, 관습에 의해 쓰며,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다. 색깔 역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원자와 진공뿐이다"
원자론을 체계화시키며 유물론 형성에도 영향을 끼친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데모크리토스의 말이다. 그는 "모든 것은 주관적인 결과물이며 분명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원자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없으며 기계적으로 움직인다고 소개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자판을 두드리고 무언가를 쓰는 행위의 실체는 원자이며, 원자의 재배열이나 구성이 '나'라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테드 창의 「숨」이 떠오르면서 전원 버튼을 끄고 내 머릿속에 회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리학에서 물질은 온도에 따라 변한다고 되어 있다. 온도가 높아지면 수증기가 되고, 온도가 낮아지면 얼음이 되는 것을 예시로 설명하고 있는데, 무수하게 많은 원자로 이루어진 '나'라는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뭔가 적당히 바람이 불면서 몸 안의 온도가 유지되는 날에는 질서정연한 느낌이 든다. '아주 잘'까지는 아니어도 뭔가를 상상하는 일이 즐겁고 작은 조개껍데기를 발견하고도 희열을 느낀다. 반대로 중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온도의 밀도가 높아지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에게 온몸이 빨려가는 기분이 든다. '유지만 하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허무하게 느껴지면서 신경세포들이 자율 주행을 하는지 한곳에 붙어있지를 못한다. '나'라는 사람 역시 자연법칙에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비가 오는 날에는 부수적인 것들이 뒤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온도가 높지 않아서일까, 몸 안으로 산소를 불어넣는데 제법 시원했다. 집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크릴화 작업을 하러 갔다. 작년 초부터 그림을 배우고 있는데, 코로나로 3개월 쉬었다가 지난주부터 다시 나가고 있다. 아크릴화는 수채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물감이 물속에서 제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수채화와는 달리 아크릴화는 겉으로 보이는 색깔은 똑같지만 원칙적으로 다른 방식을 추구한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물을 활용한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아크릴화 작업을 할 때는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하긴 수채화도 처음에 그랬으니, 아크릴화가 처음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미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뚫고 살짝 밀어 넣는 힘이 부족하지 않았다. 네이버에는 북한이 남한의 행동에 따라 보복행위를 하겠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너무 뜨겁다. 너무. 지구가 자정 능력을 실험하며 온도를 높이는 것도 힘겨운데, 눈과 귀, 가슴을 겨냥한 일련의 행위들이 온도를 높여보겠다고 부추기고 있다. 온도는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이동한다고 들었는데, 언제쯤 자율 주행을 멈추고 제자리를 찾기 위해 몸을 기울일지 궁금해진다.
머리와 어깨 사이로 우산을 살짝 끼운 채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아침에 들었던 노래가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I wish I had've known this before...
Now I'm replaying our good bye... ♪"
by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