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건네는 말
벌써 몇십 년 전의 일이다. 조금 늦게 철든 딸은 엄마의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딸은 똑같은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왜 매월 똑같은 날짜에 엄마가 절에 가는지,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는데 왜 아침마다 엄마가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소란스러웠는지, 밥상 위로 정리되지 않는 말이 떠돌아다니는 눈치가 보이면 급하게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밥상을 치웠는지.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어린 딸은 엄마 나름의 살아가는 발버둥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면서도 절에 가는 엄마, 누구도 듣지 않는 말을 계속 내뱉는 엄마, 서둘러 밥상을 치우는 엄마가 안 돼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스물몇의 딸은 용기를 내어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의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까지 편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다. 엄마의 생일날, 아침부터 어린 딸은 마음이 급했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기는 했지만 방송에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방송에 나오면 다행이지만, 방송에 나오지 않으면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생각에 딸은 내뱉고 싶은 말을 돌돌 말아 다시 집어넣었다. 엄마의 생일을 특별한 날로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특별한 날은커녕 우울한 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무 말 없이 회사로 출근했다.
운이 좋았는지, 간절함이 닿았는지 라디오에서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연이 소개가 되었다.
방송을 들으면서 딸은 생각했다.
'그래도 아침에 얘기라도 해 둘걸 그랬어...'
엄마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혼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멘트가 흘러나왔다.
"따뜻한 사연입니다.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딸과 엄마를 위해 케이크와 가족사진 촬영권을 보내드립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딸은 기뻤다. 케이크 때문이 아니었다. 가족사진 촬영권 때문도 아니었다. 엄마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 엄마의 생일을 알아주는 흔적을 가졌다는 것,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면서 딸의 마음은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한쪽 벽면에 이십 년을 훌쩍 넘긴 엄마와 딸의 사진이 보인다. 금박 테두리를 한 액자는 세월을 비켜섰는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다. 긴 머리칼의 딸은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파운데이션을 열심히 찍어 바른 모양이다. 얼굴 전체에서 빛이 난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엄마는 딸과의 외출에 마음이 설렜는지 평소와 다르게 얼굴에 미소 가득하다. 사고로 입술을 다치면서 립스틱 바르는 것을 주저하는 평소와 달리, 짙은 립스틱을 가지런하게 바른 모습 속에 딸의 손을 잡고 사진관을 향했을 엄마와 딸의 모습이 그려진다.
엄마의 둥지를 떠난 딸은 새로운 둥지를 만든다고 여념이 없다. 엄마는 빈 둥지를 둘러보다가 시선이 갈 때마다 액자를 매만지면서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가장 좋은 시절을 딸에게 내어준 엄마, 엄마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딸, 서로의 인생을 덧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둘은 알고 있을까?
by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