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건네는 말
"엄마, 그 친구가 프랑스에서 3년 정도 살다 왔다는 거야...영어도 잘하고, 스페인어도 잘하고..."
"그래? 같은 나이지만 경험이 완전히 다르다. 그치?"
"..."
"너도 한국사를 좋아해서 자격증도 따고, 너도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잖아..."
"그 친구도 중급 자격증 있던데?"
"그래?"
어제저녁, 조금 늦게 귀가한 아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 나온 이야기이다. 평범해 보였던 친구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 자신과 비슷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비슷하지 않다는 것, '이 정도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믿고 있는데, '그게 아닌가?'라는 느낌이 생기면서 조금 당황하는 분위기였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소나기를 맞이할 때가 있다. 비가 올 거라는 예보에 우산을 챙겨나가는 날도 있지만, 파란 하늘이 전혀 비가 올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주어 우산을 챙겨나가지 않게 되는 날도 있다. 이상하게 꼭 그런 날이 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아침부터 맑은 하늘은 '비가 올 거라고 했어'라는 말을 무색하게 했고, 당당하게 우산 없이 길을 나서게 했다. 딱히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서 비가 오기 시작했고, 오후 5시쯤에는 양동이로 붓는 것처럼 사무실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뿔싸"
빗속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였다.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퇴근하는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퇴근하자는 부탁을 했고, 남편은 일부러 사무실에 들러주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남편이 도착했다.
"밖에 비 많이 오지?"
"아니, 지금은 거의 안 오는데..."
"어? 아까 밖에 보니까 비가 많이 오던데..."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안 오네..."
"그래? 괜히 와 달라고 했네... "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말할 수 없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제 비가 오기는 했었나, 하늘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가끔 소나기를 맞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주어진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다. 경험으로 또 다른 경험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지나온 세월 동안 쌓은 맷집으로 아이에게 '너도 장점이 있으니 충분히 괜찮아'라고 빛남을 얘기했지만, 아이는 자신의 빛남보다 친구의 빛남에 눈이 부신 모양이었다. 하긴 아이만 그럴까, 어른인 나도 종종 그런 것을.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몸이 움츠려든다. 아마 아이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 같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상을 만난 그런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엄마, 나도 나중에 어학원 같은데 보내줘... 영어 단어 외우고 공부하는데 말고... 알았지?"
"그래, 알겠어. 나중에 필요하면 보내줄게"
미국을 가보고 싶다, 영국을 가보고 싶다고 말하던 아이에게 프랑스는 지도 속에 존재하는 나라였다. 그런 곳에서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친구에게 낯섬과 동경이 동시에 생겨났을 것이다. 나중에 어학원을 갈지, 가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아이 스스로 마음 정리에 들어간 것 같았다.
준비 없이 나왔다가 만난 소나기, 짧게 훅 치고 빠져나간 소나기였다. 조금 억지스러운 바람이겠지만 나는 아이가 언제든 소나기를 맞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훅 치고 빠져나가는 모습에 많이 당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소나기에 몸을 흠뻑 젖게 되더라도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긍정성이 몸 안에 내재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 밖에서 살아갈 때 밀가루 반죽하듯 네모도 만들어보고, 세모도 만들어보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전혀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주눅 들기보다는 "이번엔 나도 이렇게 만들어볼까?"라는 마음으로 다시 밀대를 굴리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소나기를 마주할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것이 소나기를 피할 방법만 궁리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엄마의 시간은 언제나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지나고 나면 자꾸 혼자 곱씹게 된다.
'이렇게 얘기해 줄걸'
'이런 말을 해줄걸'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데, 아이와 관련해서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엄마는 엄마인가 보다.
by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