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들었던 그녀의 이야기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인생수업을 다시 읽으면서 '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잊고 지냈던, 스치듯 지나갔던 그녀의 얼굴이 기억났다.
인생수업에 그래픽 디자이너 조슈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슈아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끝내 어떤 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다가 떠난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잘못된 것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똑똑하셨고, 재능도 있었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셨어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셨지만 다만 절대 시도하지 않으셨죠. 그러면서 늘, '우리 집안은 일이 잘 풀린 적이 없어'하고 말씀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는 20년 동안 연락이 끊긴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무척 만나 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러면서도 먼저 연락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늘 실패만 되풀이했다고 생각하는, 주저하면서 두려움을 끌어안고 살다간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어가던 조슈아는 어느 순간 갑자기 뭔가 머리를 한대 맞은 사람처럼 깨달음을 느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낸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어요. 난 언제나 내가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그릴 만한 실력이 없다고"
조슈아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게 용기 내어 고백한다.
"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하셨지만 나는 다를 거예요"
조슈아의 사연을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그녀가 떠오른 장면은 바로 저 문장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잘 풀린 적이 없어'
나를 찾아온 그녀가 자주, 많이 내뱉었던 말이었다.
'내 인생은 잘 풀린 적이 없어'
그 말을 뱉은 사람도 조슈아의 사연과 비슷했다. 바로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녀의 친정엄마였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친정엄마가 세 아이를 키웠다고 한다. 그녀는 첫째였고 아래로 여동생이 둘 있다고 했다. 어떤 준비도 없이 남편과 이별한 후 그녀의 친정엄마는 대장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친정엄마는 자신도 언제든 아이들 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고, 애써 두려움을 외면하며 나름대로는 그럴듯한 모습을 완성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 역시 예상하지 못한 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한다. 상황은 좋지 않았고, 결국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6개월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따라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넜다고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끝마친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어 나온 말이 저 문장이었다.
"내 인생은 잘 풀린 적이 없어"
그녀의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병원과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곁을 지킨 사람이 그녀였다고 한다. 그녀의 엄마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그 시작이 '내 인생은 잘 풀린 적이 없어'였다고 했다.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그녀의 엄마는 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말했다.
"내 인생은 잘 풀린 적이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지... 너희 셋 굶어죽게 만들까 봐 정말 두려웠어... 갑자기 병에 걸리고 너희를 하고 헤어지는 꿈을 얼마나 많이 꿨는지 몰라... 두려웠어... 내 인생은 잘 풀리지 않도록 되어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너희들에게 물려줄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아... 갑자기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들에게 물려줄 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 진짜 그렇게 됐어... 내 인생은 진짜 잘 풀린 적이 없어... 그래도... 더 악착같이 살았어... 잘 풀리지 않는 내 인생을 닮아 너희도... 나처럼 살 수도 있으니 내가 어떻게든 더 물려줘야 한다고... 하나라도 더 물려줘야 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방향에서 날아온 엄마의 이야기에 그녀는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이토록 두려움에 둘러싸여 꽁꽁 묶여있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로서는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다고, 엄마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미안함, 두려움, 죄책감 같은 것이 밀려오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다고 얘기하면서 두 눈에 눈물이 그렁했던 그녀, 그녀가 떠나면서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녀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처럼 마음이 먹먹해진다.
"엄마가 임종을 앞두고... 정신이 흩어지기 전의 일이에요. 직감적으로 유언... 같았어요... 내 인생은 잘 풀린 적이 없었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너희가 있었어. 그걸 몰랐어. 너희가 있다는 것을 놓치고 살았어... 너희는 나처럼 살지 마. 너희는 절대 나처럼 살지 마..."
"엄마는 끝까지 숙제를 안겨 주었어요. 우리를 위해 평생을 살다가 떠나면서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남기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거기에서 벗어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물론 아직도 완벽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그런 생각 하지 않으려고요. 엄마가 우리를 위해 고생만 하고 살다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누구나 목적이 있잖아요. 엄마도, 엄마 삶의 목적이 우리에게 뭔가를 남기는 것에 있었다고 생각하려고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 가르쳐주고 싶어 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우리 때문에 죽을 만큼 고생만 하다고 떠났다고 생각하면 힘들 것 같아요... "
"앞으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고 해요. 무언가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갖지 않으려고요. 두려움에 꽁꽁 묶인 사람도 되지 않으려고요... 누구나 저마다의 삶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요. 내 인생이 잘 풀린 적이 없어... 엄마가 그 말을 할 때 진짜 듣기 싫었거든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애써... 꾹 눌러요. 지금 내 인생은 잘 풀리고 있어...라고 속으로 주문을 걸면서 말이에요"
우연한 기회로라도 다시 만나기를 바랐지만, 그 이후 그녀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들처럼 그녀 역시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두 발을 땅에 단단하게 디딘 채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믿어보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파수가 비슷한 친구, 가족, 이웃이 떠올랐었다. 언젠가 그들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그날인 것 같다. '지금 내 인생은 잘 풀리고 있어...라고 속으로 주문을 걸어보면서 말이에요'라는 끝맺음 말을 덧붙여서 꼭 전하고 싶었는데, 참 다행이다.
-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