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그러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찌감치 마음을 결정했다.
'수학, 과학은 내 길이 아니라고'
착하고 예쁜 생물 선생님과의 학교생활에 대한 추억은 즐거웠지만 과학, 그중에서도 화학, 물리는 영역 밖이었다.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이 자장가처럼 들렸고, 지구와 우주를 연구하는 것은 과학자의 몫이라고 일임했다. 벼락치기 공부법은 과학에 통하지 않았다. 수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수학을 붙잡았는데, 그때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게 수학이었어?"
"이렇게 접근하는 거였어?"
하지만 학교를 마친 후, 수학을 다시 만날 일은 없었고, 과학은 아예 잊고 살았다.
며칠 전의 일이다.
한창 화학에 재미를 붙인 첫째가 틈만 나면 나를 불러놓고 화학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더니 어제는 급기야 둘째를 불러놓고 주기율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기율표만 알면 선생님 얘기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누나가 주기율표를 외우지 못해 고생했다는 얘기와 함께 보드판에 줄줄줄 적기 시작했다.
"동생아~! 너 이거 외우면 인싸(인사이더) 되는 거야!"
누나의 유머를 가장한 강제교육에 참여하게 된 둘째가 안타까워 지원사격에 나섰다.
"아들아, 엄마랑 같이 외워보자. 우리 둘이 누가 빨리 외우나 시합해볼까?"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대어도 아니고, 쌍형 문자도 아니고, 한글도 아닌 것 같은 문자의 나열이 거실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수헤리베 붕탄질소..."
"아니, 수헬리베... 헬륨....!"
"어, 수헬리네..."
"아니, 수헬리베... 베릴륨...!"
"수헬리베붕탄진산....그 다음이 뭐더라?"
"플! 플!"
"풀?"
"아니, 플루...."
"아! 플네. 나마알규...."
"그때는 나만알~규..이렇게 외우면 돼!"
학교 다닐 때도 제대로 암기하지 못한 주기율표를 마흔 넘어 아들과 시합하면서 외우게 될 줄 몰랐다. 의지를 불태워서,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겠다면서 열심히 외웠다. "수헬리베붕탄진산플네나마알규인황염아 칼! 칼!" 둘째보다 늦게 외웠지만, 여하튼 우리는 성공했고, 첫째로부터 "잘했어"라는 칭찬을 받았다. 칭찬을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인싸'의 기쁨을 잠시 누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잠시였다.
갑자기 흥미를 느낀 첫째가 조금 더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원자핵, 중성자, 양성자, 전자, 몰법칙, 이온결합, 공유결합으로 설명이 나아갔다.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첫째와 달리 둘째와 나는 주기율표를 외우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리의 난감한 표정을 알아차린 걸까. 급히 첫째가 수습에 들어갔다.
"아이, 참.... 내가 아빠처럼 설명하네? 미안~ 그럼 오늘은 요기까지!"
야호! 만세!
둘째와 나의 '만세합창'을 끝으로 어쩌다 화학수업이 끝났다. 이과, 신소재 관련 전공을 한 남편은 틈(^^;)이 나면 아이들에게 배경지식을 들려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첫째가 수학, 과학을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항상 남편에게 달려갔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해결사 역할을 해주었는데, 종종 선(^^)을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는 용감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엄마... 저기까지는 안 궁금한데, 아빠가 자꾸 더 많이 설명하려고 해~~"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피식 웃는 첫째.
오래전 첫째의 말과 오늘 첫째의 말이 겹쳐지면서 남편과 마주보면서 한참 웃었다.
인생, 살아볼 일인 것 같다.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좋은 추억이 되는 것 같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