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0년대에 태어났다. 대부분 나이 또는 언제 태어났는지를 놓치고 산다. 굳이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첫 번째이고, 진짜 어느 순간부터는 나이가 헷갈리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놓치게 되었다. 상황적인 요인도 한몫했던 것 같다. 거의 나이가 어린 사람 축에 끼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의 부족으로 받아들이는데 무리가 없었다. 어떤 특별한 어려움 같은 것 없이, 많은 부분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던 나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만나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서른 후반에서 오십, 육십의 숫자와 만남을 지속해왔다면 지금은 그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스물 후반, 서른 초반에서 시작해 육십을 훨씬 넘긴 사람을 만나고 있다. 숫자가 늘어난 것에 대해서는 그리 이상하다거나 어려운 점은 따로 발견되지 않았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한 것에 대한 존경, 차마 정면에서 마주하지 못할 것 같은 세월에 대한 존중이 한데 어우러져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다소 진지하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흔히 얘기하는, 「90년생이 온다」라는 책도 있지만,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존경이나 존중이 생겨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문투성이였다.
예리한 칼을 들고 섬세하게 종이를 잘라내는 사람처럼 날카로운 면을 보이다가도 단면이 아닌 입체의 모습을 놓친 표정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뭔가를 열중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다가도 '되어도 그만, 안되어도 그만'이라며 툭 뱉어내는 말투에는 날것의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어정쩡한 감정이 파도에 몸을 맡긴 것처럼 출렁거렸고, 잠시 진정된 이후 그때부터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곤 했다.
'지금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이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알아차림의 달인은 아니어도 그래도 제법 능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과 코드를 맞추는 일은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그들의 말투, 그들의 생각과 방식,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세상이 궁금했다.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고민에 빠졌고, 그때 나는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결정했다.
'멋진 어른, 멋진 사람처럼 다가가야지라는 마음을 내려놓아야겠어'
'그들의 세계 또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라고 받아들여야겠어'
몇 가지를 결심한 이후부터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뭔가를 알려주겠다는 마음, 어떤 패턴을 읽어내고, 질서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내가 경험한 것 이외 모든 것을 '경험해보지도 않은 세계'로 분류하여 받아들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자문하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그러면서 스스로 질서나 패턴에 대해 불편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것들을 발견해내겠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이를 잊고 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투나 행동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될 때가 있다. 흔히 얘기하는 '나이 많은 사람티'를 발견한 셈인데, 그럴 때마다 얼른 머릿속의 서랍장을 뒤적여 문장 하나를 찾아온다.
"저는 일단 저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적은 사람의 말은 옳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독서모임 시간에 어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모임 시간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저 문장의 영향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나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그나마 유쾌함과 명랑함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