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이 생일이었다.
생일 전날, 아니 그 며칠 전부터 친정엄마에게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소고기는 샀나?"
"미역은 있나?"
급기야 생일 전날, 최종 점검 전화가 걸려왔다.
"낼 아침에 바쁘니까 저녁에 미역국 끓여놓으면 편해. 저녁에 끓여서 내일 꼭 챙겨 먹어!"
"참, 불조심하고"
친정 엄마 표현대로, 나이 오십을 앞둔 딸에게 가스 불조심을 얘기하는 친정엄마.
미역과 소고기가 없는지, 놓치지 말고 미리 사놓으라고 당부하는 친정엄마.
여전히 나는 엄마의 '딸'이고,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다.
결혼을 하기 전, 친정엄마는 생일이면 미역국에 생선 두 마리, 불고기나 잡채를 꼭 준비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초등학교 6학년 생일상. 자개농이라고 불리는 장롱 앞에서 잔칫상에 버금가는 생일상을 받아놓고 엄마는 기념촬영을 해주었다. 남는 것이 사진이라고 했던가, 정말 사진만 남았다. 그 사진이 없었다면 내가 그렇게 넘치는 생일상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 언저리에서 걸쳐두고 놓치며 살았을 것이다. 사진 덕분에 그날의 감정과 장면을 붙잡을 수 있었고, 내가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엄마는 대구에서 생활하는 딸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결혼 초에는 미역국을 끓여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친정에 내려가면 챙겨주었다.
"며칠 있으면 생일이잖아. 이거 밖에 해동만 해서 먹으면 되니까, 가져가. 알겠지?"
그렇게 받아온 가방에는 미역국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생선 몇 마리는 기본이었고, 멸치볶음과 나물 몇 가지는 세트 메뉴였다. 조금 바쁘다는 이유로 내려가는 일이 어렵게 되었을 때는 엄마는 양손 가득 짐 보따리를 들고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친정엄마는 함께였다. 결혼을 하기 전에도 엄마였고, 결혼을 한 후에도 엄마였다. 나이 오십을 앞둔 지금까지도.
나이가 조금 먹은 걸까. 내 생일이나 남편 생일날 아침이 되면 양쪽 어른들에게 전화를 드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습관처럼 생일날이나 그 전날 전화를 드리고 있다..
"어머님, 남편 낳는다고 고생 많으셨지요? 미역국 챙겨드셨어요?"
"엄마, 나 낳는다고 고생 많았지? 아침에 미역국 먹었어?"
생일. 삶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라는 생각을 자주, 많이 하게 된다.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놀라움, 기적에 가까운 일이 내게 일어났고,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거듭 느끼는 요즘이다. 나의 태어남에는 어떤 차별화된 전략이나 의도는 없었다. 순전히 우연이었고, 또 과정적으로 정해진 것도 없었다. 항상 순탄한 것도 아니었고, 늘 불행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고 존재감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누군가의 노력 덕분에 두려움이 따를 지경, 삶의 또 다른 부분을 경험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생일, 여태껏 '내 생일'인 줄 알고 살았다. 아니었다. '내 생일'이 아닌 '친정엄마의 생일'이었고, '친정아버지의 생일'이었다. 그러니까 내 생일이 아닌. 우리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마흔일곱이라는 숫자를 마주해서 알게 되었다. 엄마의 생일에 미역국을 한번 끓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참 쉽지 않다. 올해는 어떻게 한번 날짜를 맞춰봐야지 하면서, 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더해볼 뿐이다.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작가